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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니맨 시즌2, 정면돌파] ③ 예고 없이 찾아온 기회를 살리는 법
삼성 육성선수 최익성 = 신인 연기자 최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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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삼성 라이온즈 육성선수가 10년 뒤 신인연기자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기회는 예고 없이 찾아온다. 아무런 준비 없이 맞이하는 기회는 부담스럽기까지 하다. 내게 날아온 연기자 제안이 딱 그런 상황이다. 솔직히 말해 난 방송에 관심 있었지 연기엔 큰 관심이 없었다. 연기를 한다고 쳐도 야구처럼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배워서 올라가고 싶었다. 연기도 야구처럼 전문직 아닌가. 뜻밖의 월반을 하게 됐지만 겁나지 않았다. 어차피 상황은 닥쳤고 나만의 근성으로 부딪히며 배워나가자는 생각을 했다.

37살. 신인연기자보다는 중견연기자에게 어울리는 나이다. 하지만 시작이 늦었다고 해서 그 차이가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건 아니다. 중학교 2학년 때 야구를 시작한 내가 명문구단의 리드오프 자리를 꿰차고 20-20 클럽에 들어간 것처럼.

촬영장에 처음 들어선 나는 삼성 육성선수 최익성처럼 움직였다. 남들보다 먼저 나가고 내 촬영분이 끝나도 모든 촬영이 마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촬영이 없는 날에도 나갔다. 다른 배우들의 수준 높은 연기를 보면서 연기에 대해 하나씩 알아갔다. 아는 게 하나도 없었기에 보고 듣는 것만으로 엄청난 공부가 됐다.

데뷔 첫 신은 지금도 머릿속에 생생하다. 처음 카메라 앞에 섰을 땐 솔직히 조금 황당했다. 나 스스로가 준비부족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종업원으로 나오는 여자주인공이 내게 화내는 연기를 보고 ‘왜 저렇게 화를 내지? 진짜 기분 나빴나?’라는 순진한(?)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신도 생각보다 길었다. 내가 방황하는 마동탁(박성민)을 설득하기 위해 나이트클럽을 찾는 장면이었다. 상대방을 설득해야 하기에 자연스레 대사가 길어졌다. 현장 분위기에 적응하랴, 대사하랴, 다른 배우와 호흡을 맞추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스태프와 상대 배우에게 피해주지 않으려 최선을 다했다.

어디서든 진심은 통하나 보다. 육성선수 시절, 내 훈련모습을 좋게 봐주신 코치님들이 좋은 기회를 주셨다. 여기서도 그랬다. 처음엔 나를 호기심 반 걱정 반으로 쳐다보던 촬영 스태프들이 어느 순간 내편이 됐다. 촬영시작한 지 6개월이 지났을 무렵, 몇몇 스태프들이 술자리에서 나를 불러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처음엔 야구선수 출신이라 거들먹거릴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고, 원래 촬영기간 동안 배우와 스태프가 친구처럼 지내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원래 최익성 선수의 팬이라 사석에서 꼭 만나보고 싶었다고 했다. 기뻤다. 그들도 그 세계에선 대단한 사람들 아닌가. 그들이 나를 기억해주고, 연기에 대한 내 열정을 이해해줘서 고마웠다.

마동탁은 이승엽이었고, 박용수는 최익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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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외인구단> 제작발표회 때 모습. 뒤쪽 사진에 이승엽 같았던 마동탁이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동탁과 함께하는 장면이 늘어났다. 마동탁을 지켜주는 역할을 누군가가 했어야 하는데 내가 그 자리를 꿰찬 것이다. 20화 중 16번이나 화면에 나왔다. 제작발표회에도 참석했고 언론에서 많은 관심도 가져주셨다. 시간이 지나며 어색하기만 했던 촬영장 분위기나 은어도 서서히 익숙해졌다.

드라마에 대한 몰입도도 점점 높아졌다. 모두 20년 동안 해왔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야구장에서 유니폼을 입고 배트를 휘두르며, 후배들을 다독이는 일. 자연스레 메소드 연기가 가능했다. 극중 소속팀인 유성을 전 소속팀 삼성이라 생각하고, 마동탁을 이승엽으로 생각했다. 마동탁을 이승엽으로 생각하기란 참 쉬웠다. 둘 다 슈퍼스타이자 내 룸메이트였고 든든한 후배였기 때문이다. 현역시절 승엽이에게 한 것처럼 다그치고 보듬어줬다. 그러자 박용수는 자연스레 최익성이 됐다. 어떤 상황에 대한 감정을 설정할 필요 없이 예전 기억을 살려 그때 감정을 끄집어내기만 하면 됐다.

부족한 연기력을 만회하기 위한 또 다른 무기도 있었다. 뻔뻔함. 제작자도 내가 연기하는 모습을 보며 “최익성 씨 생각보다 뻔뻔하시네요. 뻔뻔해야 연기를 잘하는 거예요”라고 했다. 뻔뻔함도 저니맨 인생에서 나온 산물이다. 현역시절 여러 팀을 옮겨 다닌 ‘구르는 돌’이었기에 뻔뻔해야만 했다. 말 한마디 안 통하는 미국과 멕시코에 혈혈단신으로 떠날 수 있었던 것도 뻔뻔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NG 몇 번 했다고, 카메라가 날 클로즈업 한다고 해서 당황스러워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렇게 나는 20년간 쌓아온 내공(?)으로 부족한 연기력을 만회했다.

드라마를 마친 뒤 정식 탤런트가 됐다. 이것도 의도한 건 아니다. 유성 감독님(김응석)이 한국방송영화공연예술인노동조합의 탤런트 위원장을 맡고 계셨다. 자연스레 노조가입 권유를 받았고 이를 승낙했다. 그렇게 프로야구 선수출신 탤런트 1호가 됐다. 많은 인터뷰 제의를 받았고 「손석희의 시선집중」 같은 프로그램에도 나갔다. 점차 많은 사람들이 나를 알아봐주기 시작했다. 처음 목표였던 ‘방송을 통한 최익성 알리기’가 큰 성과를 거둔 것이다.

연기에 재미를 붙여 다른 작품에도 출연하고 싶었다. 그 세계에 발을 담갔으니 찔끔하고 나오기 보단 더 많이 배우며 오래해보고 싶었다. 공개오디션을 보러 다니고 매니지먼트 회사에도 들어갔다. 그땐 잠시 잊고 있었다. 난 한곳에 쉽게 정착하기 힘든 저니맨 인생이라는 걸. [정리=차원석 기자@Notimeover]

* 최익성
이름보다 ‘저니맨’이란 호칭으로 더 유명한 남자. 힘들고 외로웠던 저니맨 인생을 거름삼아 두 번째 인생을 ‘정면돌파’ 중이다. 현재 저니맨야구육성사관학교 대표를 지내며 후진양성에 힘 쏟고 있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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