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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현철의 링딩동] 광복 70년 프로복싱 명승부의 산실 ‘한일전’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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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하라를 다운시킨 후 자신감 넘치는 포즈를 취하고 있는 홍수환. 가사하라는 12전승(9KO)의 유망주였다.

일본 프로복싱은 현재 굉장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작년 12월 베테랑 챔피언 오마르 나바에스를 2회KO로 꺾고 단숨에 슈퍼플라이급 세계 최강으로 떠오른 이노우에 나오야를 비롯, 지난 4월 3체급을 제패한 WBA 플라이급 챔피언 이오카 카즈토 등 현역 세계챔피언만 무려 8명에 이른다. 단지 숫자만 많은 것이 아니다. WBA 슈퍼챔피언으로 격상된 우치야마 다카시(10번 방어, 8KO)는 명실상부한 슈퍼페더급의 넘버원으로 손꼽히며, 8차 방어(6KO)에 성공 중인 WBC 밴텀급 챔피언 야마나카 신스케 역시 동급 최고의 복서로 군림 중이다. 지난 5월 불과 5전만에 세계챔피언에 등극한 WBO 미니멈급 챔피언 다나카 고세이, 4대 메이저기구를 모두 점령했던 IBF 미니멈급 챔피언 한국계 다카야마 가쓰나리 등 일본의 현 세계챔피언들은 각기 뚜렷한 개성을 발산하면서 자국의 복싱팬들에게 행복을 안겨주고 있다.

수많은 세계챔피언을 양산한 외관상 실적과는 반비례로 챔피언의 가치 하락에 대한 위기의식도 내재된 상태지만 일본 복싱은 탄탄한 외적 인프라를 구축한 상태다. 15위까지 발표하는 일본의 각 체급 랭커가 되기 위해서는 웬만한 아마추어 스타 출신이 아니라면 최소 20전 정도는 치러야 랭킹 진입이 가능하다. 랭킹 진입 후보군을 추려놓은 B급 랭커(10위까지 발표)의 면면도 상당한 경력자들로 채워져 있다. 국내에서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1980년대 체급별 한국챔피언 클래스의 선수들은 기량이 세계 랭커 못지않았고, 각 체급마다 유망주와 라이벌이 넘쳐났다. 국내 랭킹에 이름이 오르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던 때였다. 30여 년 전 프로복싱이 최전성기를 누리던 국내의 상황이 현재 일본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멀지만 가까운 일본의 복싱 상황이 이처럼 좋은 시기에 국내에 유망주가 있다면 세계도전의 문을 두드릴 기회는 충분할 텐데 안타깝게도 지금 당장 일본의 세계챔피언들에게 대적할 만한 선수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이런 아쉬움은 일본 복싱 관계자들도 공감하고 있다. 어느 종목이든 그렇겠지만 스포츠에서 한일전의 관심은 유별나다. 특히 프로복싱에서의 한일전, 그것도 세계타이틀매치는 양국 모두 흥행의 보증수표나 다름없기 때문에 국내에 우수한 선수가 나타나기를 우리만큼 일본도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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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의 라이벌전은 언제나 화끈했다. 독특한 라이벌 의식이 잠재되어 있어 선수들도 더욱 정신무장에 집중한다. 복싱팬들을 열광시켰던 수많은 시합 중에서도 한일전은 단연 백미로 손꼽힌다. 1960년대에는 일본 복싱이 우리보다 한 수 위였으나 1970년대를 기점으로 1980~90년대에는 우리가 일본을 압도했다. 2000년대 중반부터 시소의 균형이 다시 일본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고 현재 세계챔피언 8명, 동양챔피언 9명을 보유한 일본과 세계챔피언, 동양챔피언은 고사하고 세계 랭커가 고작 1명뿐인 우리의 상황은 비교조차 불가능할 정도다. 2006년 1월 지인진과 코시모도 다카시의 WBC 페더급 타이틀전 이후 한일 간 세계전은 자취를 감췄다가 7년 10개월 후인 2013년 11월 제주에서 손정오와 가메다 고키의 WBA 밴텀급 타이틀매치가 벌어진 바 있다. 광복 70년. 국내 선수들의 약진,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일본과의 진검 승부를 기대하면서 숱한 명승부를 남긴 한일 간 세계타이틀매치를 되돌아본다.

1970년대 9전 6승(3KO) 3패(2KO)

세계타이틀을 걸고 한국과 일본이 처음 맞붙은 경기는 1975년 6월 유제두와 와지마 고이치 간의 WBA Jr.미들급 타이틀매치다. 동양 미들급 챔피언으로 타이틀을 14차례나 방어한 유제두는 뒤늦게 찾아온 세계도전 기회에서 일본의 영웅 와지마를 통렬한 7회 KO로 꺾고 김기수와 홍수환에 이어 대한민국의 세 번째 세계챔피언으로 이름을 올렸다. 적지인 일본 후쿠오카에서 챔피언을 세 차례나 매트에 누이며 온 국민들의 울분을 한 방에 잠재운 이 시합은 지금도 올드팬들의 뇌리에 깊이 남아 있다. 1차 방어도 일본에서 KO승으로 장식한 유제두는 이듬해 2월 펼쳐진 와지마와의 리턴매치에서 마지막라운드인 15회 KO패로 챔피언벨트를 풀었다.

●유제두 vs 와지마 고이치 1, 2차전 경기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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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펀처 로얄 고바야시를 꺾고 국내 네 번째 세계챔피언이 된 염동균(왼쪽).


1976년 11월에는 염동균이 일본의 하드펀처 로얄 고바야시를 완벽하게 제압하고 WBC S밴텀급 챔피언에 등극한다. 1977년 11월 4전 5기의 신화를 창조한 홍수환은 3개월 후 동경에서 무패의 도전자 가사하라 류를 도합 다섯 번 다운시키고 15회 판정승으로 첫 방어에 성공했다. 1978년에는 정상일이 WBA Jr.플라이급 챔피언 구시켄 요코에게, 주호가 WBA Jr.미들급 챔피언 구도 마사시에게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각각 5회 KO패와 15회 판정패로 도전에 실패했다.

1979년 3월 18일 '링의 대학교수'라는 미겔 칸토(멕시코)의 15차 방어를 저지하면서 WBC 플라이급 타이틀을 획득한 박찬희는 2개월 후 이가라시 쓰도무를 누르고 첫 방어에 성공한다. 10월에는 WBC S라이트급 챔피언 김상현이 야구선수 출신의 도전자 요가이 마사히로를 처절하게 분쇄한 끝에 11회 KO승, 원정방어전을 승리로 장식했다. 70년대에는 일본과 아홉 차례 세계타이틀을 놓고 격돌하여 6승(3KO) 3패(2KO)로 상대전적 우위를 기록했다. 일본에서 7번, 국내에서는 2번 한일 세계타이틀전이 개최됐다.

1980년대 30전 18승(15KO) 12패(3KO)

1980년 1월 3일 정초부터 김성준이 일본에서 나카지마 시게오에게 판정패로 WBC L플라이급 타이틀을 빼앗겼다. 홈 팬들까지 나카지마의 주먹은 머리를 포함해 세 개였다는 비아냥을 쏟아 부었어도 챔피언벨트는 일본으로 넘어갔다. 그 해 5월 18일 광주에서 민주화운동이 일어나던 날 박찬희는 서울에서 오구마 쇼지에게 통한의 9회 KO패로 6차 방어에 실패한다. 이후 오구마에게 김성준이 한 차례, 박찬희가 두 차례 도전했지만 모두 판정패로 물러나고 말았다. 오구마와 박찬희의 두 번째 대결에서는 다운을 한 차례 빼앗아낸 박찬희가 잘 싸우고도 홈 텃세판정으로 경기에는 앞서고 판정에서는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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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희(왼쪽)와 오구마 3차전 조인식. 우측은 현재까지 활동 중인 이원복 KBC 국제고문.


●세계타이틀매치 한일전 하이라이트 영상

같은 해 12월 13일 김태식이 LA에서 타이틀을 빼앗겨 한국 프로복싱이 무관으로 전락하고 42일 만에 세계챔피언의 계보를 이은 것은 19세의 김철호였다. 베네수엘라에서 타이틀을 따온 김철호는 와타나베 지로(1차)를 판정으로, 자칼 마루야마(3차)와 혼혈복서 이시이 고키(4차)를 각각 KO로 누르고 새로운 일본복서 킬러로 자리매김한다. 특히 후일 WBA와 WBC 양대 기구를 정복하는 명 챔피언으로 성장한 와타나베와 김철호의 일전은 시종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대단한 명승부였다.

구시켄의 후계자 도카시키 가쓰오는 1981년 12월 1,200발이 넘는 펀치를 터트린 끝에 김환진에게 판정승, WBA Jr.플라이급 타이틀을 획득한 후 지명도전자 김성남, 전 챔피언 김환진과의 리턴매치에서 모두 승리했다. 도카시키는 WBA 타이틀을 빼앗긴 후 1984년 8월 WBC 동급 챔피언 장정구에게 도전장을 내고 나름대로 선전했지만 9회 TKO로 무너진다. 기량이 정점에 올라 있던 전성기의 장정구는 전 세계챔피언이자 한국복서에게 유독 강했던 도카시키를 맞아 기막힌 파이팅을 펼쳐 양국 복싱팬들에게 최고의 명승부를 선사했다. 이나미 마사하루(1차), 구라모치 다다시(5차), 오하시 히데유키(11차, 15차)와의 2연전 등을 모두 완승으로 장식한 장정구는 헤르만 토레스(2차, 6차, 9차), 프란시스코 몬티엘(7차, 10차), 에프렌 핀토(12차) 등 일본에서 수입한 멕시코 용병들까지 모조리 꺾어내 일본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각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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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지에서 요가이를 처참하게 KO시키고 2차 방어에 성공한 김상현.


●장정구 하이라이트 영상

일본의 실력파 챔피언 와타나베 지로는 1983년 10월 권순천의 지명도전을 부상판정으로 뿌리친 뒤 1985년 12월에는 국내로 원정, 윤석환을 5회 KO로 꺾고 일본인 세계챔피언의 첫 해외원정 방어전 승리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윤석환이 와타나베에게 패하고 5일 후 WBA Jr.플라이급 챔피언에 등극한 유명우는 키유나 도모히로(2차), 고미야마 가쓰미(11차), 다이호 겐분(13차)을 모두 깨끗하게 KO시켜 격이 다른 챔피언임을 과시했다. 1987년 5월에는 박찬영이 일본에서 WBA 밴텀급 챔피언 무구루마 다쿠야를 통렬한 11회 TKO로 잠재우고 챔피언벨트를 차지한다. 강펀치의 소유자인 무구루마에게 스피드를 동반한 환상적인 연타를 퍼부어 승리한 박찬영은 후일 일본으로 스카우트되어 선수생활을 연장하기도 했다. IBF가 출범할 당시 일본에서는 IBF를 인정하지 않아 IBF 타이틀을 놓고 벌어진 한일전은 단 네 차례에 그쳤다. 1980년대에 한국과 일본은 총 30회 맞붙어 한국이 18승(15KO) 12패(3KO)로 앞섰고, KO율은 압도적으로 높았다. 대전 장소는 국내에서 16회, 일본에서 14회 개최됐다. [황현철 헤럴드스포츠 복싱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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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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