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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현철의 링딩동] 신인왕 출신의 세계챔피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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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 시작. 신인왕 출신으로 프로복싱 세계챔피언에 등극한 14명을 사진만 보고 누구인지 알아맞춰 보자. 정답은 기사 최하단.

지난 1월 27일부터 30일까지 광주광역시에서는 KBF(한국권투연맹)가 주관하는 전국 신인왕 대회 예선전이 열렸다. 밴텀급에서 미들급까지 8개 체급에 총 94명이 출전한 이번 대회는 2월 12일 준결승전과 2월 27일 결승전이 예정되어 있다. 한국권투위원회(KBC)의 고유 브랜드이던 신인왕전은 1962년 6월 제1회 대회가 시작되었고, 37회 대회가 펼쳐진 2012년을 마지막으로 3년간 열리지 못했다. 2012년 초부터 시작된 권투계의 법적 분쟁으로 인하여 신인왕전조차 개최되지 못하는 최악의 침체를 겪은 탓이었다.

심각한 내홍으로 인해 권투계는 여러 단체로 갈라졌고, 2014년 7월 설립된 KBF가 주관하여 어렵게 이번 신인왕 대회가 개최되었다. 신인왕전은 아마추어 출신의 일부 선수를 제외하면 내세울 것 없는 신인들에게 출세가도의 지름길이었다. 지금도 신인왕-한국챔피언-동양(OPBF)챔피언-세계챔피언의 단계는 국내 프로복싱에서 최고의 엘리트코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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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챔피언의 등용문

신인왕을 거쳐 첫 세계챔피언이 된 선수는 전 WBC 슈퍼라이트급 챔피언 김상현이다. 김상현은 50년의 신인왕전 역사상 유일하게 부산에서 개최된 1974년 제6회 대회에서 우승했다. 이후 2년간은 대회가 열리지 않았고, 신인왕전이 제대로 자리 잡힌 시기는 1977년의 제7회 대회부터다. 이때부터 신인왕전은 1992년까지 줄곧 문화체육관에서 거행되었다(86, 87, 90년 제외). 문화체육관은 197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국내 프로복싱의 성지로 자리매김했던, 복싱팬들에게는 고향과 같은 향수가 느껴지는 곳이다.

7회 대회는 MVP로 선정된 김태식(WBA 플라이급)과 우수 선수상을 받은 박종팔(WBA IBF S미들급)이 경량급과 중량급의 슈퍼스타로 뻗어나가는 출발점이 된 무대다. 1980년(제10회)까지 4년 동안 7명의 세계챔피언이 신인왕에 등극했고, 이와 맞물려 국내 프로복싱은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1978년 김철호(WBC S플라이급), 1979년 정기영(IBF 페더급)을 거쳐 1980년에는 장정구(WBC L플라이급), 권순천(IBF 플라이급), 백인철(WBA S미들급) 등 역대 신인왕 중 최고의 스타군단이 배출되었다. 이 외에도 동양챔피언 이상호, 이승순과 이일복(WBC S페더급 1위) 등이 1980년의 신인왕 출신이다. 후일 WBA 밴텀급 챔피언이 된 박찬영은 주니어밴텀급 결승전에서 이경수에게 패해 준우승을 차지한 바 있다.

신인왕전의 파급 효과가 거세게 복싱계를 강타하자 주관 방송사인 MBC의 권유로 1981년에는 전, 후기 신인왕을 각각 선정해 통합신인왕전을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악수가 되고 말았다. 전기 신인왕을 차지한 선수들이 부상을 당하거나 다음 경기에서 패하는 변수가 발생하면서 대타로 출전한 선수가 후기 신인왕을 꺾는 경우가 생겼고, 당일 경기에서 지고도 통합신인왕의 트로피를 받는 촌극이 빚어졌다. 이로써 통합신인왕전은 단 한 해의 해프닝으로 마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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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분되며 주춤해진 신인왕전의 열기
과한 기대가 독이 되었을까, MBC 신인왕전이 소위 잘 나가는 콘텐츠로 대중에게 부각되자 KBS에서는 전국 신인선수권대회를 만들었고, 1981년 5월 1회 대회를 개최했다. 전년도 MBC 신인왕전 준결승전에서 장정구에게 패했던 신희섭은 이 대회에서 MVP로 화려하게 부활하며 후일 IBF 플라이급 챔피언에 올랐다.

1982년 2회 대회에서는 정비원(IBF 플라이급)과 유명우(WBA 주니어플라이급)가 각각 장려상과 감투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렇게 대회가 양분되면서 신인들의 설 자리는 많아졌으나 아무래도 두 대회 모두 이전에 비해 조금은 수준이 하락될 수밖에 없었다. 1981년부터 1984년까지 4년간 신인왕 출신으로 세계타이틀을 획득한 선수는 전무했고 1983년의 박병수, 1984년의 허준과 이왕섭 등 3명의 동양챔피언만 배출되며 신인왕의 거센 돌풍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1980년대 초반은 프로복싱의 질적, 양적인 최전성기로 대중의 인기와 선수들의 수준이 엄청나게 높은 시기였다. 굵직한 아마추어 선수들이 프로에 대거 넘어오는 등 굳이 신인왕전이 아니라도 세계무대로 선수들이 진출할 수 있는 루트가 다양해졌고, 대회 자체가 양분되면서 신인왕전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도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다. 특히 1982년은 프로야구가 출범했기 때문에 KBC 전국신인선수권 2회 대회(1982년)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으며, 1983년 프로축구, 프로씨름까지 생겨나자 주관 방송사인 KBS는 발을 뺐다. MBC 신인왕전이 겨울에 치러지는 반면 KBS의 신인선수권대회는 야구, 축구 시즌인 5월~7월에 시행되니 방송사로서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이 대회는 2회를 끝으로 싱겁게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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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한국 프로복싱 최고의 콘텐츠

그러나 신인왕전은 여전히 부와 명예를 위해 권투에 뛰어든 젊은이들에게 기회의 장이었다. 권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신인왕전은 챙겨보고, 신인왕전에 빠져들다가 복싱팬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대중의 관심이 예전 같지는 않았지만 이는 신인왕전의 문제가 아니라 프로복싱 자체의 인기가 조금씩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다양한 프로스포츠가 생기면서 팬들의 관심이 분산된 영향도 컸다. 이후에도 1985년(제15회) 이경연(IBF 미니멈급), 최창호(IBF 플라이급), 1986년(제16회) 박영균(WBA 페더급)에 이어 1989년(제19회) 이형철(WBA 주니어밴텀급), 1992년(제22회) 백종권(WBA 슈퍼페더급)이 신인왕 출신의 세계챔피언 명맥을 이어갔다. 그리고 1993년(제23회) 비운의 챔피언 최요삼(WBC L플라이급)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신인왕 출신의 세계챔피언은 탄생하지 않았다.

비록 세계챔피언과는 인연이 닿지 않았지만 신인왕 출신으로 동양챔피언까지 오른 선수들은 총 33명에 이른다. 1994년 이후로 프로복싱 시장이 크게 위축되었음에도 1995년 유승호(OPBF 라이트급), 1996년 김정범(OPBF 슈퍼라이트급), 1997년 정재광(PABA 페더급), 1998년 강필구(OPBF 플라이급), 2000년 손정오(PABA 슈퍼플라이급), 김한철(PABA 미들급), 2003년 유명구(PABA 플라이급), 이재성(IBF 팬퍼시픽 슈퍼밴텀급), 김용성(WBO 아시아퍼시픽 슈퍼라이트급) 등은 동양챔피언으로 맹위를 떨쳤다. 이 중 유명구, 이재성은 아직 현역으로 활동 중이고, 손정오는 재기를 모색하고 있어 이들 중 세계챔피언이 나올 가능성도 충분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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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우승을 차지한 박찬영 외에도 서성인(1978년), 김봉준(1984년), 최용수(1990년), 지인진(1991년) 등은 신인왕전에서 패했으나 와신상담하여 훗날 세계챔피언이 된 명복서들이다.

신인왕전의 우승이 앞길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고 신인왕전에서 탈락했다고 좌절할 필요도 없다. 이번에 새롭게 탄생될 신인왕 중에서 세계 정상을 정복하는 선수가 나온다면 영원한 챔프 최요삼 이후 22년 만의 경사가 된다. 과연 누가 2015년의 신인왕에 등극하고 어떤 감동을 안겨줄 것인지 복싱팬들의 관심은 지금 신인왕전에 맞춰져 있다. 준결승 진출자들의 선전을 기대한다. [헤럴드스포츠 복싱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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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게재 순서와 동일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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