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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늘집에서] 폴라 크리머를 멘붕에 빠뜨린 한국인 프로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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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10월 영종도의 스카이72 골프클럽에서 열린 하나외환 챔피언십에서 경기중인 폴라 크리머와 캐디 콜린 칸. 사진=하나금융그룹 제공


몇 년 전 하와이에서 열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SBS오픈 때의 일이다. 대회 개막 하루 전 아마추어 골퍼와 출전선수가 동반 라운드를 하는 프로암이 열렸다. 이 대회는 한국의 방송사인 SBS가 개최하는 대회라 프로암 참가자 중엔 한국인이 많았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미국의 폴라 크리머는 베테랑 캐디인 콜린 칸을 대동한 채 대회코스인 파머 코스의 1번홀 티 박스에 도착했다. 동반자들과 간단한 인사가 끝난 후 라운드가 시작됐다. 50대의 나이에도 탄탄한 체격을 갖춘 동양인 동반자가 눈에 띄었다. 볼을 엄청 잘 칠 것 같은 내공이 느껴지는 분위기였지만 본인은 "주말 골퍼(weekend golfer)"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체격 좋은 그 한국인 골퍼는 첫 홀부터 페이드를 걸어 티 박스 앞에 있는 아름드리 나무를 피해 280야드를 웃도는 드라이버 샷을 날렸다. 폴라의 티샷과는 30~40야드 차이가 나는 장타였다. 그린까지의 거리는 불과 40야드. 폴라를 포함해 나머지 동반자 모두가 그 남성 동반자의 볼이 떨어진 자리로 이동해 두 번째 샷을 날렸다.

참고로 미국의 프로암은 대부분 스크램블 방식으로 진행된다. 프로 1명에 아마추어 4명이 라운드를 하는데 티샷부터 세컨드샷, 그린 위의 퍼팅 등 다음 플레이의 위치를 정할 때 동반자의 샷중 가장 좋은 위치를 합의해 선택한다. 동반자의 샷 중 가장 좋은 자리에서 나머지 동반자들도 다음 샷을 하는 방식이다. 통상적으로 샷이 길고 정확한 프로들이 친 볼이 선택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그 50대의 한국인 남성 동반자는 맞바람이 부는 2번홀에서는 낮게 깔리다 떠오르는 스팅어 샷으로 바람을 뚫고 멀리 볼을 보냈다. 이 샷을 본 후 폴라는 물론 스크래치 골퍼인 캐디 콜린까지 고개를 갸우뚱 거리기 시작했다. 둘은 “저 사람은 분명 아마추어 골퍼가 아닐거야!”라는 의구심을 가졌으나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6번홀이 끝난 후 둘의 궁금증은 극에 달했다. 마침 다음 홀로 이동하던 중 안면이 있는 한 한국선수의 매니저를 만나게 됐다. 캐디 콜린이 달려가 “저 한국인 남성 알아?”라고 물었다. 한국선수 매니저는 “왜? 저 분 한국의 유명한 프로님이셔”라고 대답하자 콜린은 손뼉을 치며 “그렇지! 그런데 폴라가 코스 점검을 해야 하는데 자기 볼로 플레이를 못해 큰 일”이라고 하소연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스크램블 방식이라 6번홀까지 모든 샷을 그 남성 동반자의 볼로 플레이해야 했다. 프로암을 통해 샷을 점검하려던 폴라는 벙어리 냉가슴(?)을 앓아야 했다. 폴라와 콜린을 ‘멘붕’에 빠뜨린 그 한국인 남성 골퍼는 바로 임진한 프로였다. 1957년생인 임 프로는 180cm 74kg의 탄탄한 체격을 갖췄으며 한국과 일본투어에서 모두 우승을 거둔 고수(高手)였다.

임 프로는 자신의 신분이 탄로(?) 나자 환하게 웃으며 폴라와 콜린에게 "재미있으라고 그렇게 했다"며 사과했다. 이후 라운드는 폴라의 볼로 진행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치러졌다. 그리고 크리머-임진한 조는 프로암에서 우승했지만 프로가 2명이라는 이유로 상을 받지 않았다.

장황하게 프로암에 얽힌 에피소드를 소개한 이유는 남자 프로와 여자 프로의 실력 차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해 보기 위함이다. 당시 임 프로는 전성기를 지난 50대의 나이 임에도 불구하고 LPGA투어의 톱랭커인 폴라 크리머가 놀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다. 남자 프로라 당연히 거리가 30~40야드 더 나간다고 해도 하와이의 변화무쌍한 바람 속에서 상황에 따른 다양한 기술샷을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경이로운 일이다. 임 프로의 선배인 최윤수 프로의 경우 한창 때 7번 아이언 하나로 수원CC에서 이븐파를 쳤다고 하니 고수들의 세계는 끝이 없어 보인다. [헤럴드 스포츠=이강래 기자]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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