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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포츠 타타라라] 2015년 듣고 싶은 뉴스(육상)-이봉주와 코오롱
#한국 마라톤은 1960~1980년대에 암흑기를 겪었다. 일제 강점기부터 손기정, 서윤복, 함기용 등 세계 최고의 마라토너를 배출한 한국이었지만, 굴곡 많은 현대사 때문인지 세계 수준과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역대 한국 남자 마라톤에서 한국 기록이 가장 오랫동안 깨지지 않은 것은 1935년 손기정이 2시간 25분14초를 세운 뒤 1957년 임종우(2시간24분55초)까지 약 22년 간이었다.

그리고 다시 1974년 문흥주(2시간16분15초)부터 1984년 이홍렬(2시간14분59초)까지 10년 동안 한국기록은 동면상태였다. 눈치 빠른 독자들은 알겠지만 앞선 22년은 암흑기로 불리지 않는다. 한국기록이 없었을 뿐 세계 최고 권위의 보스턴 마라톤에서 1947년 서윤복이 2시간 25분 39초의 세계 최고기록으로 우승했고, 1950년에는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이 1~3위f를 휩쓸었기 때문이다. 워낙에 세계적인 선수였던 손기정의 기록이 빼어난 까닭에 기록경신이 늦어졌을 뿐이지 약소국 한국의 마라톤은 강했다. 진짜 암흑기는 후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현재 한국 마라톤의 최고기록은 2000년 도쿄 대회에서 이봉주가 세운 2시간7분20초다. 내년 2월이 되면 만 15년 동안 요지부동인 것이다. 이미 수치상 앞선 1차 암흑기를 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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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은 베를린 올림픽 남자 마라톤에서 세계기록을 세우며 우승했다. 2시간29분20초로 당시 '마(魔)의 벽'이라 불리던 2시간30분대를 최초로 돌파했다. 1947년 서윤복의 보스턴마라톤 우승기록도 세계 최고기록이었다(2시간25분39초).


#마라톤은 비인기 종목인 육상에서 특별한 위상을 가지고 있다. 엄청난 수의 동호인이 있고, 그나마 미디어의 관심이나 지원이 나은 편이다. 그래서 다른 육상의 세부종목은 ‘마라톤만 육상이냐?’라고 볼멘 소리를 한다. 실제로 대한육상경기연맹에서 경기인 출신의 최고 보직인 전무이사(혹은 상근 부회장)는 대부분 장거리 출신이었다(지금도 그렇다). 그나마 유일하다시피 국제경쟁력이 있던 ‘육상의 성골’ 마라톤이 이 지경이니 단거리, 도약, 투척 등 다른 세부종목은 참담하다. 스포츠강국 중 기초종목인 육상과 수영이 한국처럼 형편없는 나라는 없다.

실제로 한국 육상은 2011년 대구세계선수권에 ‘개최국 노메달’의 수모를 당했고, 올해 인천 아시안게임에서도 1978년 방콕 대회 이후 36년 만에 ‘노골드’에 그쳤다. 둘 다 안방에서 말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예전과는 달리 호된 비판도 드물고, 책임지는 사람도 없고, 정부와 육상연맹도 두루뭉수리하게 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더 걱정이다. 정치도 중요하고, 먹고 사는 문제는 더 시급할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스포츠 영역에서는 김연아-류현진이나, 인기절정의 프로야구와 비교해 그 수백분의 일이라도 비인기 종목, 그것도 기초종목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지난 11월 8일 이동찬 코오롱 명예회장이 타계했다(향년 92세). 코오롱(KOLON)이라는 회사명이 ‘코리아 나일론(KOREA NYLON)’에서 나왔을 정도로 고인은 한국 섬유산업의 개척자였다. 그리고 체육계의 큰 어른이기도 했다. 대한농구협회장(1980~1983년), 대한골프협회장(1985~1996년)을 역임했고, 1997년엔 2002 한일 월드컵 초대 조직위원장을 맡았다. 골프의 겨우 내셔널 타이틀이 걸린 한국오픈은 지금도 코오롱이 주최한다. 대회장소인 천안 우정힐스 골프장에서 ‘우정’은 고인의 호다.

특히 이 명예회장은 마라톤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1982년부터 코오롱 고교구간 마라톤대회를 개최했고, 코오롱 마라톤팀을 창단했다. 여기에 1980년대 초반 한국 마라톤의 2시간 15분대 돌파에 5,000만 원, 10분대 돌파에 1억 원이라는 파격적인 상금을 내걸어 한국 마라톤의 중흥을 이끌었다. 앞서 설명한 이홍렬(나중에 가수가 됐다)이 5,000만 원을 받았고, 황영조가 1992년 2월 올림픽 제패에 앞서 1억 원을 가져갔다. 당시 1억 원은 서울 강남에 30평형 아파트 2채를 살 수 있는 거금이었다. 생전에 이 명예회장은 ‘마라톤식 경영’이라는 말을 쓸 정도로 애정이 대단했다. “절대 무리하지 않고 분수에 맞는 경영을 펴왔으며, 이상은 높게 갖되 겸허한 자세로 이를 정복해 나가는 등산식 경영과 목표를 향해 쉼 없이 일정한 페이스를 유지해 가는 마라톤식 경영으로 코오롱을 이끌어왔다(1991년 리쿠르트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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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당시 이봉주(오른쪽 2번째) 등 마라톤대표팀을 격려하고 있는 고 이동찬 코오롱 명예회장. 맨 오른쪽이 고 정봉수 코오롱마라톤팀 감독이고, 가운데가 김이용 선수, 맨 왼쪽은 황규훈 건국대 감독(현 삼성전자 감독)이다. 사진제공=코오롱


#동갑내기 한국 마라톤의 걸출한 스타였던 황영조와 이봉주는 한때 코오롱에서 한솥밥을 먹었다. 황영조는 올림픽 우승으로 ‘평생이사직’을 보장받았으나 1997년 말 IMF 외환위기가 터지자 불성실한 근무를 이유로 먼저 해고됐다. 이봉주는 1999년 고 정봉수 감독의 독선적인 팀운영에 반발해 후배들과 집단이탈했고, 2000년 시드니올림픽을 앞두고 삼성전자육상단의 창단멤버로 합류했다. 지난 11월 초 이봉주는 이동찬 명예회장의 빈소를 찾았다(황영조가 다녀갔는지는 모르겠다. 비슷한 시기 불법임대로 벌금형을 받았다고 알려졌다). “건강하실 때 진즉에 찾아뵀어야 했는데, 죄스럽고….” 특유의 느릿한 말투와 함께 이봉주는 진정 슬퍼했다. 언론인터뷰에서는 “눈물이 나오는 것을 참느라 혼났다. 마라톤에 열정적인 분이셨다. 코오롱에 있을 때 시합하고 찾아뵈면 이뻐해 주시고, 아버님처럼 대해주셨는데…”라며 안타까워했다(<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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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고 이동찬 코오롱 명예회장은 빈소를 찾은 이봉주. 사진제공=코오롱


#최근 육상계에는 물밑으로 소문이 돌았다. 이봉주가 코오롱 마라톤팀의 감독으로 거론된다는 내용이었다. 코오롱 마라톤팀은 지난 8월 정만화 감독과의 계약기간이 끝난 후 아직 후임 감독을 선임하지 않고 있다. 이럴 때는 거짓말을 못하는 이봉주에게 직접 묻는 게 확실하다. 답변은 이봉주다웠다. “그건 코오롱에게 물어야지.” 맞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가 코오롱 감독 자리에 대해 큰 애정을 나타냈다는 점이다. “가능하다면 큰 영광이다. 비록 저간의 사정으로 코오롱을 떠났지만, 이제는 많은 것이 변했다. 이동찬 명예회장이 만든 코오롱으로 돌아가 마라톤 중흥을 이끌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다.”

당연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삼성육상단으로부터 미국연수까지 보장된 코치직을 제의받았지만 이를 뿌리친 이봉주였기 때문이다. 올시즌 클리블랜드로 돌아온 NBA의 르브론 제임스처럼 친정팀에 대한 향수가 짙었던 것일까? 코오롱은 당분간 감독자리를 공석으로 둔 채 지영준 코치 체제로 마라톤팀 재건에 착수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봉주 감독’은 가능성만 열려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역사는 돌고 돈다. 이봉주가 코오롱을 나올 때는 코오롱과 고 정봉수 감독이 앙시앙 레짐(구체제)의 상징이었다. 지금은 18년째 대한육상경기연맹 회장사를 맡아오고, 15년째 육상팀에 가장 많은 돈을 쓰고 있는 삼성(전자)이 그렇다. 연맹이나, 팀이나 피로도가 높아 보인다. 인천 아시안게임 때 만난 이봉주는 ‘지도자’에 대해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한국 마라톤이, 한국 육상이 이래서는 안 된다. 은퇴한 후 충분히 시간도 지났으니 좋은 팀에서 열심히 후배들을 가르치고 싶다.”

2009년 전국체전에서 우승(41번째 완주)한 후 은퇴한 이봉주가 6년 만에 지도자로 컴백할 것인가? 그것도 한국 마라톤의 중흥기를 연 고 이동찬 명예회장의 코오롱으로? 즐거운 상상이면서 2015년 듣고 싶은 육상뉴스이기도 하다. 설령 요즘 유행하는 ‘희망고문’으로 끝난다고 해도 말이다. [헤럴드 스포츠=유병철 기자]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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