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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美 노병 “자유·안전 위한 참전, 후회는 없다” [70th 창사기획-한미동맹 70, Alliance Plus]
윌리엄스 대령 “자랑스런 동참”
류재식·백복성 옹 “미군이 은인”
‘한미동맹’은 단순가치 그 이상
앨머 로이스 윌리엄스 미국 예비역 해군 대령은 헤럴드경제와 서면인터뷰에서 “대한민국의 자유와 안전을 지키기 위한 노력에 동참했던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미국을 국빈방문했을 때 윌리엄스 대령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친수하고 있다. [연합]

“대한민국의 자유와 안전을 지키기 위한 노력에 동참했던 일을 후회하지 않습니다.”(앨머 로이스 윌리엄스 미국 예비역 해군 대령)

“6·25 때 미국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나라를 위해 달려온 바람에 빨갱이 나라가 되는 걸 피할 수 있었어요. 은혜를 모르면 사람이 아닙니다.”(류재식 6·25참전유공자회 서울지부장)

70여년 전 6·25전쟁에 직접 참전한 한국과 미국의 노병들에게 한미동맹은 단순한 추상적 가치나 개념 이상의 의미였다.

지난달 미국을 국빈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으로부터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윌리엄스(98) 미 예비역 해군 대령은 헤럴드경제와 서면인터뷰에서 6·25전쟁 때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후회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는 “전쟁은 오래전 일이고 나는 매우 나이가 많은데, 얼마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아름다운 사람들과 건물, 발전상을 보고 자랑스러웠다”며 “그리고 여기에 기여하기 위해 내가 참전했다는 게 매우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윌리엄스 대령은 1952년 11월 F9F 팬서를 몰다 회령지역에서 조우한 소련군 미그-15 7대와 치열한 공중전 끝에 4대를 격추한 공로를 세웠다. 귀환했을 때 기체에는 무려 263개의 총탄 자국이 남아 있었다. 6·25전쟁 이후에는 미 해군 내 최고 조종사 훈련 프로그램의 초대 교관을 맡은 ‘원조 탑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소련군의 6·25전쟁 개입을 우려한 당시 미 당국의 판단에 따라 이 같은 공적이 기밀로 분류돼 ‘잊힌 영웅’으로 남을 뻔했지만 뒤늦게나마 미 최고 훈장 격인 명예훈장 수훈이 추진 중이다.

윌리엄스 대령은 윤 대통령과 함께한 한미동맹 70주년 기념 오찬에 대해 “나는 왕족 대접을 받았는데 내가 행사의 일부가 된다는 게 매우 중요했다”며 “훌륭한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어 매우 즐거웠다”고 기억했다.

또 윤 대통령이 친수한 태극무공훈장과 관련해 “어떤 의미에서 나는 압도당했다”면서 “수십년이 지난 일인데 큰 영광이었고, 멋진 훈장을 받게 해준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고 했다.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전쟁 초반 열세에 놓였다가 미군을 위시한 유엔군의 참전 이후 반전을 목도한 한국군 노병들에게 있어 한미동맹의 의미는 한층 더 각별했다.

정전협정 체결을 앞두고 중공군의 마지막 대공세가 거셌던 1953년 7월, 6·25전사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로 기억되는 금성지구전투에 참전한 류재식(91·예비역 육군 대령) 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 서울시지부장은 “전쟁으로 국군이 13만여명이 죽었는데, 미군이 4만여명이나 죽었다. 대단한 일”이라며 “전쟁 때도 전쟁 때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도 미군이 우리 부대에 목욕탕을 지어주는 등 많은 도움을 줬다”고 회고했다.

그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지금 미군 철수하라 하고, 사드(THAAD) 배치하지 말라 하고 하는데 은혜를 모르면 사람이 아니다”면서 “북한 핵도 한국 혼자서는 안 된다. 한국과 미국 그리고 일본까지 뭉쳐서 대비해야 북한의 남침, 제2의 6·25전쟁을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의 가슴에는 금성지구전투 격전 중 가슴으로 깊게 파고들어 수술로도 제거하지 못한 중공군 총탄이 여전히 박혀 있다.

해방 이후 국군의 모태가 된 조선경비대에 자발적으로 몸담아 무장공비 토벌에 나서고, 6·25전쟁이 발발하자 참전한 백복성(94·예비역 육군 대위) 옹은 전쟁 당시 미군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1952년 10~11월 42일간 철의 삼각지대 일대에서 벌어진 저격능선전투 등을 치렀다. 저격능선전투는 백마고지전투와 함께 6·25전쟁의 2대 격전지로 꼽힐 만큼 치열한 고지전이었다.

그는 “저격능선에서 미군을 많이 만났는데 대화는 잘 안 돼도 아주 친절하고 같은 전선에 있다는 이유에서 전우애가 대단하다는 걸 느꼈다”며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르겠지만, 총알이 빗발같이 쏟아져 날아오는 속에서 죽느냐 사느냐 싸우는데 계획적으로 싸워준 미군이 은인이었다”고 회고했다. 이어 “야간에는 미군이 해질 무렵부터 새벽까지 조명탄을 터트리고 서치라이트를 비춰주는 덕분에 겨우 싸울 수 있었다”면서 “그때 미군이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벌써 공산화되고 말았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제주농업중학교에 재학중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간다는 말을 듣고 학도병으로 참전해 낙동강 전투와 영월발전소 사수작전, 화천 949고지 전투 등에 참전한 김홍수(92·예비역 육군 대령) 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 경기도지부장 역시 6·25전쟁 당시 미국과 미군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고 거듭 강조했다.

김 지부장은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원이 1950년 7월 5일 오산 죽미령에서 미군과 북한군의 첫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지만 이게 북한에 큰 경고가 돼 결국 주춤하게 만들었다”며 “북한군 공격이 며칠 동안 주춤한 바람에 우리가 시간 여유를 벌 수 있었고 나중에 낙동강 방어선 사수와 인천상륙작전도 가능해 대한민국을 구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됐기 때문에 안보가 보장돼 한국이 경제나 모든 분야에서 오늘날 눈부신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며 “안보뿐만 아니라 경제나 모든 분야에 걸쳐서 한미동맹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김 지부장은 6·25전쟁과 베트남전 참전 공로를 인정받아 화랑무공 훈장과 보국훈장 삼일장, 그리고 미 육군 표창 등을 받기도 했다.

신대원·오상현·박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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