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독일 통일 외교가 한국에 주는 교훈
[헤럴드경제 =원호연 기자]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졌을 때 동독과 서독의 주민들은 환희에 찼지만 독일의 주변국은 우려에 가득 찼다. 그들은 통일을 막거나 적어도 최대한 미뤄야 하는 것을 믿었다. 독일과의 전쟁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헬무트 콜 독일 총리는 “영국, 프랑스 등 동맹 국가들의 분위기가 얼음처럼 차가웠다”고 회고했다. 물론 독일의 첫 침공 대상이었던 폴란드도 독일 통일을 환영하지 않았다.

미국은 독일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통일 독일이 나토(NATO)에 포함될 경우에만 통일에 찬성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독일이 중립국이 되면 나토가 무너질 것이고, 나토가 없어지면 미국이 유럽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었기 때문.

소련 군대는 여전히 바르샤바조약기구에 참여하는 동독에 주둔했고 여전히 동독의 체제를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2차 대전을 일으켰다 분단된 독일이 통일을 달성할 수 있는 방식은 두가지였다. 53개 전쟁 상대국과 평화조약을 맺거나 독일을 분할 관리한 4강 연합 회의에 독일이 일종의 준회원 자격으로 참가하는 것이었다. 전자는 막대한 배상금을 치러야하고 후자는 독일이 통일의 주도권을 잃게 된다.

한스 디트리히 겐셔 독일 외무장관은 “나는 독일의 외무장관으로서 그런 회의에 참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모든 민족에게는 지켜야 할 품위가 있다는 것이다.

소련이 독일의 첫 설득 대상이 됐다. 소련의 경제위기는 1990년 봄에 더욱 심화됐고, 위기에 처한 소련은 금 보유고를 팔고 심지어 다이아몬드 채굴권까지 팔았지만 국가 부도 위기에까지 몰렸다. 소련은 차관이 필요했고 이는 독일에 기회였다.

소련은 독일에 약 200억마르크가 필요하다고 전했다. 독일은 소련에서 원하는 차관의 4분의 1밖에 제공할 수 없지만 결국 차관을 제공하는 등 총 550억 마르크에 달하는 경제 지원을 약속했다. 대신 통일을 지지하도록 설득했다.

이후 콜과 겐셔는 고르바초프 서기장을 만나 통일을 위해 소련과 해결해야 할 문제를 합의했다. 독일은 통일과 동시에 주권을 되찾고, 소련군은 최대 4년 안에 동독에서 철수하며, 새로 독일 연방에 가입한 옛 동독 주들의 군사적 지위는 일반적인 나토 군대와 같다고 합의했다. 소련의 조건은 동독지역에 나토 소속 외국 군대가 주둔해서는 안 되고 핵무기가 배치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독일이 중립국이 아닌 나토 회원국으로 남기로 한 것은 통일 독일이 다시 자신들의 평화를 위협하는 군사 강국으로 크는 것을 우려한 영국과 프랑스 등을 설득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스스로를 다자 체제에 묶음으로써 주변국을 안심시킨 것. 프랑스와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창설을 주도해 유럽을 경제를 매개로 하나로 묶는 것을 주도한 것도 이들을 설득하는데 주효했다.

한반도의 통일 역시 남북 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북아 전체의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중국은 북한을 자국의 방어막으로 여기고 있고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은 통일 한국에서 주한미군을 여전히 주둔하려고 할 것이다.

한국이 주목할 점은 독일의 통일 외교전략이 냉전의 심화와 데탕트, 냉전의 재심화로 이어지는 국제 관계의 부침에도 지속적이고 일관되게 추진됐다는 것과 이를 통해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주변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능동적으로 통일 과정을 주도하는 역량을 갖췄다는 점이다.

이같은 이유로 외교 전문가들은 남북간 신뢰를 쌓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가 동북아 내 정치 불신을 해결하는 동북아 평화협력구상과 긴밀히 연결돼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이 한반도 통일을 둘러싼 각국의 경쟁을 ‘윈윈 게임’으로 전환하는 ‘게임 전환자(game changer)’가 돼야 한다는 얘기다.

why37@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
          연재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