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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r.프레지던트’ 김영남
김일성 · 김정일 · 김정은 3대 세습권력 보좌…이란 비동맹회의 참석 존재감 과시…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그의 생존법은
北 대표적 명문가 출신 소련 유학파…특유의 친화력에 강한 충성심 ‘2인자’ 유지 비결

국제무대 ‘벼랑끝 외교’ 주도·김정일도 인정한 국가수반…저우언라이·JP에 비견할 만


30일부터 열리는 국제 비동맹회의(NAM)에는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참석했다. 북한 최고 권력자는 김정은 국방1위원장이지만,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참석했다. 북한 헌법에서 최고인민회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주권기관’이며 상임위원장은 ‘국가를 대표하며 다른 나라 사신의 신임장, 소환장을 접수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대외적인 국가의 대표란 뜻이다. 최근 장성택 등 김정은 시대의 주역들이 주목받고 있지만, 김영남의 대외적 위상은 김정일 시대에 이어 계속 권력서열 2위다. 올해 84세라는 나이가 말해주듯 김영남은 김일성부터 김정일, 김정은까지 김 씨 왕조 3대에 걸쳐 북한의 외교 부문을 총괄해 온 명실상부한 2인자다.

▶김일성의 눈에 들다=1928년 평양에서 태어난 김영남은 김일성종합대학을 다니던 중 소련 모스크바대학으로 유학을 가 외교학을 전공했다. 김기남 당중앙위원회 비서와 당중앙위원회 군사부장을 역임했던 김두남이 그의 동생들이다. 아들 김동호와 딸 김호정도 각각 외무성과 대외문화연락위원회에서 주요 직책을 맡고 있는 등 김영남의 집안은 북한의 대표적인 명문가다. 김일성의 친인척이라는 관측도 있었으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중국에서 항일활동을 하던 팔로군 출신이 군부를 주름잡던 시대임에도 그는 소련 유학파로 당시 북한의 대(對)소련 외교관계에서 중요한 축을 담당했다. 특히 김영남은 뛰어난 문장력으로 김일성 연설문 초안을 전담하면서 신임을 얻는다. 1962년 불과 35세에 외무성 부상에 오른 것은 그가 외교 부문에서 김일성에게 얼마나 큰 신임을 얻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북한 외교의 대부=‘벼랑끝 전술’이라고도 불리는 북한 외교는 사실 그의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한의 외교는 본래 국력에 대비해 국제무대에서 늘 강한 인상을 남겼고, 강대국과의 외교에서도 두둑한 배짱을 자랑한다. 그는 1962년 부상에서 1972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되면서 장관급인 노동당 국제부장이 된다. 이후 주로 당에서 외교 부문을 담당하다 1983년 부총리 겸 외교부장(외교장관)에 오르면서 외교 부문을 총괄하게 된다. 차관에서 장관까지 20년이나 걸렸지만, 그 새 북한의 외교는 완전히 김영남의 몫이 된다.

외교무대에서 그를 접한 외교관들은 “첫 인상은 부드럽고 친근하지만, 막상 업무에 들어가면 단호하고 직설적이기 그지없는 성격”이라고 기억했다. 북한 외교의 스타일이 곧 김영남의 스타일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주목할 것은 그가 외교ㆍ국제 부문 외 다른 분야에는 단 한 번도 눈을 판 적이 없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최고권력자의 의중을 외교무대에 반영시키는 데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이 같은 김영남식 충성심은 피의 숙청이 거듭됐던 김일성 시대를 살아남은 비결이다.

한 탈북 고위인사는 김영남에 대해 “김일성이 벽을 가리키며 ‘저것은 문이다’라고 한다면 김영남은 그 말을 믿고 기꺼이 벽을 뚫고 밖으로 나가려 할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김영남은 외교관으로서의 친화력과, 최고권력자의 방침을 수행하는 충실한 2인자로서의 자질을 모두 갖춘 셈이다.

▶김정일도 인정한 국가수반=2000년 남북 정상회담이 끝난 뒤 6ㆍ15 공동성명서를 만들 때다. 김정일은 “북쪽에는 나라를 대표하는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있으니 수표는 김 상임위원장과 하고 합의 내용은 제가 보증하는 식으로 하면 되겠습니다”고 제안했다고 한다. 물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통령인 내가 직접 와서 정상회담을 하는거 아니오. 좀 시원하게 해주셔야 하지 않겠소”라며 결국엔 김정일의 서명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김정일이 국가의 대표로서 김영남의 위상을 얼마나 인정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일화다.

비행기를 타지 못해 해외로의 ‘아웃바운드(out-bound) 외교’에 약점을 가진 김정일로서는 북한 국가대표로 김영남만큼 적합한 이가 없었을 것이다. 김일성 때부터 확실한 충성심을 보여준 데다 정치와 군무에는 일절 간여하지 않는 자기관리가 김정일의 김영남에 대한 신뢰의 바탕이 됐다. 권력장악에는 탁월한 수완을 보였지만, 일반 행정과 외교에는 비교적 어두웠던 김정일 시대에 김영남의 위상은 단순한 ‘얼굴마담’을 넘어 국가기능의 일반적 관리를 전담하는 ‘최고 살림꾼’이었다.

▶3대에 걸친 2인자, 저우언라이, 김종필에 비견=김영남은 중국의 저우언라이(周恩來), 남한의 김종필 전 총리에도 비견된다.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毛澤東)에 이은 2인자로 중국의 외교, 경제, 행정 부문의 기틀을 다진 인물이다. 김 전 총리도 5ㆍ16 핵심인물로 박정희 대통령시대에는 외교ㆍ정치 분야의 2인자로, 이후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 등 문민정부에서도 ‘킹메이커’ 역할을 했다. 비록 1인자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1인자에 버금가는 역사의 족적을 남겼다는 점이 꼭 닮았다.

임을출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김영남은 북한과 국제사회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나름대로 무난하게 수행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았다”며 “절대로 자기세력을 만들지 않고 권력욕을 드러내지 않는 특유의 비정치성이 영원한 2인자의 위치를 가능하게 한 것”이라고 말했다.

신대원 기자/shindw@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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