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픽사베이)
[헤럴드경제 스타&컬처팀=한수진 기자] “올해 초 통장잔고가 0원이었던 적이 있어요. 쉼 없이 작품을 했는데도 말이죠”
8년차 연극배우 임성균 씨(33)의 이야기다. 현재 극단 공존에 몸담고 있는 그는 연기 활동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고 있다. 공연 수익만으론 생활비를 충당하기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모든 노동엔 응당한 대가가 주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임 씨를 비롯해 아직도 많은 연극인들이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 뿐만 아니다. 올해 초 ‘미투 운동’과 함께 수면 위로 떠오른 극단 내 만연한 성폭력과 배우 박해미의 남편 황민 씨가 소속 단원들에게 억지로 술을 먹였다는 증언 등이 불거지며 갑질 문제까지 대두됐다. 꾸준히 지적되어 온 문제지만 이를 불식시키기 위한 움직임은 여전히 미흡하기만 하다.
임 씨는 “연기를 전공하고 극단에 들어가 배우활동을 시작했다. 객원배우로 들어갔다. 3개월을 연습해서 무대를 올렸는데 10만원 받은 것이 전부였다. 생활 유지가 안 돼 아르바이트도 같이 했는데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다 보니 몸이 고돼서 온몸에 두드러기가 생길 정도였다. 나도 그렇고 주변 연극배우들도 아직까지 아르바이트로 생계유지를 하는 편이다”며 “난 그나마 순탄한 배우 생활을 해온 편인데 주변 배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극단 내 성희롱 등 안 좋은 일들을 겪기도 하더라. 안 좋은 부분들이 세습된 것들이 많다”라고 설명했다.
■ “연출이 울고 있는 여배우에 다가가 성추행”
갑질 문제도 심각하다. 공연계서 존경 받던 인물인 이윤택 연극연출가의 성폭력 사건은 유명 사례다. 그가 지위를 이용해 가한 극단 내 성폭력은 수년에 걸쳐 수십 명의 피해자를 낳았다. 그의 입김 하나에 무대 위 배역이 달라지는 배우들로썬 그를 대항할 재간이 없었다.
최근엔 배우 박해미가 대표로 있는 해미뮤지컬컴퍼니가 문제가 됐다. 박해미의 남편인 황민 씨가 면허 정지수준의 음주를 한 상태에서 운전하다 교통사고를 냈다. 이 사고로 유대성 등 동승했던 배우 2명이 숨졌다. 이후 유대성의 아버지는 한 방송에 출연해 황 씨의 갑질을 폭로했다. 유 씨 아버지는 “(황민이) 만날 술만 먹였다. (아들에게) 많이 들었다. 아들이 (황민이) 술 먹고 운전을 해서 걱정이 된다고 하더라”며 “찍히면 (공연에) 출연을 못하니 참아야 한다더라”고 주장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배우를 지망하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연극은 기피 대상 1호가 됐다. 익명을 요구한 예술대 1학년 재학생 A씨(26)는 “사실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게 배우로서 가장 이상적인 일이다. 하지만 연극계와 관련해 안 좋은 이야기를 전해들은 게 너무 많다 보니 꺼리게 되는 게 사실”이라며 “동기가 130여명이 되는데 연극한다는 친구가 한 명도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연극배우 B씨(30)는 “친한 여배우 중 극단에서 성추행을 당하고 업계를 떠난 친구가 있다. 당시 친구가 극단 내 연습실에서 힘들어 울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연출이 다가와 갑자기 옷을 찢고 성추행을 했다더라. 업계에서 워낙 입김이 센 연출이어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극단을 떠났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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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 길 먼 예술인복지법, 사각지대 놓인 연극인들
연극인에 대한 복지도 사각지대에 놓였다는 평가가 흘러나온다. 지난 2015년 연극배우 김운하 씨가 고시원에서 사망한 지 닷새 만에 발견됐다. 고독사였다. 이전엔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 씨가 생활고를 겪다 세상을 떠났다. 비극적 죽음이었던 만큼 세간의 관심도 따랐다. 이로 인해 2011년 11월 예술인복지법이 제정됐을 정도다. 이 법안을 바탕으로 2012년 예술인복지사업 시행 주무기관인 한국예술인복지재단도 설립됐다. 하지만 예술인들은 입을 모아 이 같은 법 제정이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5008명의 예술가를 상대로 조사한 ‘2015 예술인 실태조사 발표’에 따르면 분야별 예술 활동의 평균 수입은 1년간 1255만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1년간 수입활동이 0원인 경우가 36.1%로 가장 많았다. 수입이 있어도 저임금에 그치고, 이마저도 못 버는 이들이 허다하다는 것이다.
특히 최근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의 ‘예술인 파견 지원 사업’ 7월 활동비 지급이 유보돼 논란이 일었다. 해당 사업이 시작된 2014년 이후 처음 있는 지급 유보 사태다. 재단 측과 예술인의 입장차가 팽배한 상황. 생활고에 시달리는 예술인들을 위해 마련된 ‘예술인 파견 지원 사업’은 한 해 74억원을 지원해 1000명에게 활동비를 지원한다. 한 프로그램 당 1000명의 예술가들을 기관이나 지역사회에 매칭시켜 자율적인 예술 활동을 하게 하고 월 120만원의 활동비를 지급한다. 단 조건이 달린다. 월 10일, 총 30시간 이상을 활동해야 한다.
이 조건이 문제가 됐다. 활동비를 받으려면 하루 3시간씩 10일간 활동해야 한다. 또한 예술인들은 활동 시 인증 사진 등을 첨부한 활동보고서를 재단 측에 제출해야 한다. 그런데 참여 예술인 5명 중 1명 꼴로 인증 사진을 조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수일에 걸쳐 활동한 것처럼 옷을 바꿔 입고 인증 사진을 찍은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된 재단 측은 활동비 지급일을 이틀 앞두고 적발 인원 200여명에게 지급 유보를 통보했다.
하지만 예술인들은 애초 월 10일, 총 30시간 조건이 행정 편의주의 발상이라며 반발하고 나섰다. 이번 일로 활동비를 지급 받지 못한 연극배우 C씨는 “한번 작업하면 10시간 이상 일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하루 3시간이라는 규정은 형평성에 대단히 어긋난다”는 입장을 밝혔다. 특히 C씨는 이번달 활동비 지급이 유보되면서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마땅한 수입이 없는 그로선 당장 끼니 해결조차 막막한 상황이다. ‘예술인 파견 지원 사업’에 참여한 예술인들은 C씨와 같은 처지 놓은 이들이 대다수다.
더욱이 ‘예술인 파견 지원 사업’으로 지원 받는 연극인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마저도 지급 받지 못하는 연극인들은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는 게 부지기수다. 노동량이 두 배다 보니 한쪽에 소홀해 질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실제 많은 연극배우들이 생활고를 버티다 못해 직업을 전향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연극배우=가난’은 하나의 명제처럼 자리 잡았다. 무대 위 화려함에 반(反)해 무대 아래에서 배고픔에 시달리는 연극인들. 한 연극배우의 고독사는 업계의 전반적 상황을 가장 극단적으로 설명해줬다. 그들 스스로가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낼 수 없으니 국가적 차원의 지원이 더욱 절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 과정에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도 중요하다. 여러 기관에서 진행하고 있는 공익 차원의 연극이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국가는 이들을 위한 진정한 복지가 무엇인 지 다시 한 번 되짚고, 연극인들은 스스로 고인물을 걷어내려 시도하는 것도 중요하다. 다시는 김운하 씨와 같은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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