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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0m 넘는 은행나무, 천년을 지켜온…‘왕의 절’ 양평 용문사 [정용식의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48) 경기 양평군 용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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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사찰은 불교의 공간이면서, 우리 역사와 예술의 유산입니다. 명산의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사찰들은 지역사회의 소중한 관광자원이기도 합니다. 치열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을 얻고자 할 때 우리는 산에 오르고 절을 찾습니다. 헤럴드경제는 빼어난 아름다움과 역사를 자랑하는 사찰 100곳을 소개하는 ‘내 마음대로 사찰 여행 비경 100선’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유난히 무더웠던 날씨도 꺾이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 단풍철이다. 은행나무는 단풍이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 고생대에 태어나 지금까지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을 정도로 생육에 강해 ‘살아있는 화석’이라 불린다.

사찰에 많이 심어져 있고 세월이 흐르면서 오랜 역사를 갖게 된 은행나무는 신령함이 부여되고 전설과 수호목이 됐다. 농경 사회에서 인간은 죽음과 위험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비, 바람, 태양, 땅, 산 등 다양한 자연과 관계 속에서 신(神)을 선택했다. 오래된 은행나무도 그 중 하나가 됐다. 다양한 전설을 간직한 영목(靈木), 마을을 지키는 신목(神木) 역할을 한 것이다.

용문사 은행나무는 가을을 느끼며 동안거를 준비하는 가을 산사(山寺)의 일부이면서 전부일지도 모른다. 비단옷 대신 삼베옷을 입은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울분을 담아 심었다는 용문사 은행나무의 꺾이지 않은 기상을 보고 싶었다.

용문사 전경

수령이 1200~1500여년으로 추정된다. 동양에서 가장 크다고 하며 어떤 이는 높이 60m, 어떤 이는 40m가 넘는다고 한다. 은행나무를 꼭 봐야겠다는 생각은 작년 영동의 영국사 은행나무를 보면서 들었다. 1000년 넘는 나이에 높이 30m인 영국사 은행나무를 보고 있으면 “저런 곳에 나무신(神)이 살고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보다 더 오래되고 큰 은행나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누구의 지팡이가 변해 은행나무가 됐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전설이 1000년을 넘게 이어져 오고 있고 지금의 나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아직 노랗게 옷을 갈아입지 않아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지는 못하지만 그 장엄한 기품 만큼은 멀리서 느낄 수 있었다.

나라의 흥성을 빌기 위한 ‘왕의 절’
용문사 대웅전과 지장전

부처님의 탄생 과정에서 태몽은 ‘여섯 상아를 가진 흰 코끼리’라고 한다. 인도인들이 신성시하는 동물은 코끼리와 사자 그리고 킹코브라 등이다. 흰 코끼리는 우리 문화에서 백호와 같이 코끼리 중 최고라고 한다. 킹코브라는 불교 경전에 등장하는 인도 용(龍)의 원형이 되는 동물이다.

거대하고 신령한 용은 불법을 수호하고 예로부터 임금을 상징했다. 용이 지상 세계와 천상 세계를 다니는 통로인 용문(龍門)은 신성한 장소이다. 용문을 오르는 등용문(登龍門)은 지금도 입신 출세를 상징한다.

대웅전

우리나라엔 경기 양평·경북 예천·경남 남해에 3대 용문사(龍門寺)가 있다. 왕실의 후원으로 지어졌거나 보수된 호국도량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각 사찰들의 위치는 풍수지리학적으로 남북으로 늘어져 있는데 양평은 용의 머리, 예천은 허리, 남해는 꼬리에 해당한다. 3대 용문사는 조선팔도가 용과 부처님의 기운을 받아 영원히 번영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작명이다.

대웅전 옆 석조약사여래좌상

경기도 양평에 위치한 용문사(龍門寺)는 해발 1157m에 산세가 험하다고 알려진 용문산 자락에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25교구 본사 봉선사의 말사다.

신라 신덕왕 2년(913)에 대경(大境)이란 스님이 세웠다고 하고,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 직접 행차해 세웠다는 설도 있다. 고려 말 1378년에 개풍(개성) 경천사의 대장경을 옮겨 봉안했고, 조선 세종 29년인 1447년에 세종의 둘째 왕자인 수양대군이 어머니인 소헌왕후 심씨를 위해 대웅보전을 다시 지었다고 한다.

관음전

이후 수양대군은 왕이 된 뒤 왕명으로 용문사를 중수하도록 했고 이후 여러 차례 중창됐다. 을사늑약 이후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으로 의병 운동이 일어나면서 용문사가 의병의 근거지로 사용되자, 일본 군이 불태워버려 당시의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됐다.

1909년부터 조금씩 재건돼 왔으나 6·25 전쟁 때 대웅전, 관음전 등만 남기고 또다시 파괴됐다. 1982년부터 불사리탑 미륵불 조성 등 새롭게 재건하면서 현재 있는 건물은 모두 1909년 이후 지어졌다.

정지국사 부도

절에서 동쪽으로 약 300m 떨어진 언덕 위 조선 전기의 정지국사(正智國師) 부도 및 탑비가 있다. 부도와 탑비는 모두 보물 제 531호로 지정돼 있다. 회암사의 지공, 나옹, 무학 스님의 부도와 더불어 조선 초기의 기품 있는 양식을 보여준다. 탑비는 부도로부터 20여m 아래 바위 위에 있는데 오랜 풍화로 훼손돼 자세히 보지 않는 한 글씨가 새겨져 있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정지국사 탑비

정지국사 지천(智泉, 1324~1395년)은 고려 후기 은둔 수행에만 힘쓴 선승(禪僧)이다. 무학 대사와 함께 나옹선사의 제자이며 개풍 경천사의 대장경을 용문사로 옮겨 봉안했다. 지천은 입적 후 어마어마한 사리가 나와 태조왕이 ‘있는 그대로 직관하는 지혜’를 뜻하는 정지(正智)라는 시호를 내렸다. 제자들이 이를 기려 용문사에 정지국사의 부도와 비를 세웠다.

고려 말, 조선 초 정지국사가 용문사에 머물 때 조성된 불상인 ‘금동관음보살좌상’이 보물로 지정돼 관음전에 봉안돼 있다.

이번 용문사를 방문했을 때 서울 조계사 옆 불교중앙박물관 ‘교종본찰 봉선사 특별전’에 봉선사와 그 말사의 유물이 이관돼 관음전에는 없었다.

서울 조계사 옆 불교 중앙박물관에 전시된 용문사 금동관음보살상

며칠 후 직접 불교 중앙박물관을 찾았다. 전시관 정중앙에 배치된 ‘용문사 금동관음보살상’은 봉선사 교구 전체 유물 중 가장 으뜸이라 할 만큼 아름답고 정교하다. 머리에 화려한 관을 쓰고 있어 더욱 눈에 확 들어왔다. 보면 볼수록 매력 넘치는 관음보살상이다.

슬픈 사연 간직한 동양최대 은행나무
금향원

용문사 경내에 수령 1200년이 넘는 동양 최대 크기의 은행나무는 여러 전설이 전해진다. 원효대사와 쌍벽을 이뤘던 신라 고승 의상대사가 지팡이를 꽂아뒀는데, 마의태자가 자청한 귀향길에 이곳을 지나니 별안간 은행나무로 변했다는 전설이 있다. 마의태자가 직접 심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금향원 금동약사여래좌상

사찰에 은행나무는 대부분 절을 창건하거나 중창한 후 마무리로 지팡이를 거꾸로 꽂았을 때 싹을 틔웠다는 삽목(揷木)의 전설(양평 용문사, 여주 신륵사, 청도 적천사 은행나무)이 전해진다. 불교 탄압기에는 은행나무 열매가 수탈의 도구로 사용돼, 암수를 뒤바꾸는 기적(강화 전등사)이 행해지기도 한다. 국가가 어려울 때 소리 내어 운다는 은행나무(영동 영국사)도 있다.

용문사 전경

지팡이를 꽂았다는 삽목 전설은 비단 은행나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최치원의 지팡이가 변했다는 해인사 학사대(전나무)와 강감찬 장군 지팡이가 변했다는 서울 신림동 굴참나무도 있다. 세조가 직접 심었다는 남양주 수종사 은행나무는 600년 동안 웅장한 기풍을 유지한 채 남한강을 내려다보고 있다.

용문사 은행나무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는 짧게는 1200년, 길게는 1500년을 헤아리며 동양 최대의 은행나무라는 영예 속에 천연기념물 30호로 지정됐다. 밑둥 둘레가 15m에 이르고 높이는 눈 짐작으론 헤아릴 수 없다. 아직도 해마다 1백 가마니 은행 알을 털어낸다고 한다. 가을이면 노랗게 물들어 거대하게 빛을 낼 정도로 은행나무의 모습은 우람하고 아름답지만 거기에 얽힌 사연은 슬프다.

경순왕의 아들이자 신라의 마지막 왕세자였던 마의태자는 국력의 절대 열세로 아버지가 나라를 고려 왕건에게 갖다 바치자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해 비단옷 대신 상례(喪禮)때나 입는 마의(麻衣, 베옷)를 걸치고 생활했다. 마의 태자는 스스로 자청한 귀향길 길목에 있는 양평 용문사를 들려 국가의 신세를 한탄하며 은행나무를 심었고, 금강산에서 은둔하며 초근목피로 연명하다 숨졌다고 한다. (의상대사의 지팡이를 별안간 은행나무가 되었다는 전설도 있지만) 아버지 경순왕은 왕건의 사위가 돼 일신을 보전했다.

용문사 은행나무 주변에 걸려있는 소원문

용문사에 남아 있는 건물들은 모두 1909년 이후 중건된 것으로 오래된 건물이 100여년 남짓하지만 1000년을 넘게 이어져온 은행나무의 존재는 그 자체가 전설이다. 천년 전 선인들과 우리를 이어주는 역사이다. 그러기에 누가 심고 꽃아뒀는지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전설에 기대고자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열망을 담은 소원문이 나무 주변에 즐비하게 걸려있고,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시공간을 뛰어 넘어 은행나무와 무엇을 공유하고자 하는 것일까.

용문산과 국민관광단지
범종각

가을 바람이 불어온 지 몇 주가 흘렀지만 아직 은행나무는 열매만 떨구어내고 색을 바꾸기에는 아직 이른 듯 푸르름만 드러내고 있다. 노랗게 물든 동양 최대 은행나무를 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았지만, 여건상 조금 일찍 찾았는데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많은지 의외로 북적인다. 서울에서 1~2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에 있어 하루 나들이 길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듯 한다. 은행나무 한 그루에 이끌려 이리 많은 이들이 올까 의문이 든다.

용문팔경 시

용문사 가는 길 초입엔 널따란 주차장과 호객 행위도 할 만큼 많은 상가들이 즐비한 용문산 국민관광단지가 잘 조성돼 있다.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 ‘용문팔경’시를 비롯해 한자와 한글로 쓰인 시가 담긴 비문과 공원을 둘러싼 소나무 숲, 농업박물관, 캠핑장이 있다.

독립운동 기념비

용문사 일주문 가는 여러 갈래 공원길 중 하나를 따라가다 보니 조성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독립운동기념비가 ‘양평 의병 기념비’, ‘용문 항일 투쟁 기념비’ 등 이름을 달리해 여러 개가 세워져 있다.

일주문

양쪽 기둥에 용머리가 있는 일주문 앞에 이르니 ‘산나물 홍보관’과 그 건너편에는 동양 최대 은행나무를 호국영목(護國靈木)이라 부르며 기리는 ‘호국 영목 은행수 제단’이 설치돼 있다. 나무를 기리는 제단을 보는 것도 처음이다.

영목제단

용문산(龍門山, 1157m) 정상 가섭봉을 오르는 등산 코스는 주로 용문사에서 출발하는 듯 7시간 코스, 4시간 코스 등 일주문 앞에 이정표가 있다. 산세가 크고 아름다워 예로부터 경기의 금강산이라고 일컬어 왔다는 설명이 덧붙여 있다. 용문산은 너무 험해 등산객의 욕이 나온다고 해, 속된 말로 욕문산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용문산 등산로 안내도

경기도에서 네 번째로 높은 산으로 미지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가 등극하면서 용문산이라 바꿔 불렀다는 전설이 있다. 중원산, 도일봉 등 800m 이상의 봉우리가 15개 이상이 있고 양평 지역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만큼 산세가 크고 험한 산이다.

출렁다리

일주문을 지나 숲길을 따라 올라가니 물이 별로 없는 계곡과는 달리 인도에 물길을 만들어둬 청량한 물소리 들으며 걷는 재미가 쏠쏠했다.

사찰이 가까워지는 위치에 계곡 길을 가로지르는 출렁다리가 있다. 건너 보는 이들은 많지 않고 눈요기 감으로 삼을 만 했다.

해탈교

관광단지 주차장에서 20분 정도 걷다 보면 해탈문 대신 해탈교가 나온다. 곧바로 용문사 사천왕문이 맞아주고 우측엔 편안하게 보이는 전통 카페인 미르카페가 휴식을 권하는 듯 했다.

사천왕문

사천왕문을 지나 계단에 올라서면 곧바로 왼편에 용문산 자락과 어울린 동양 최대 은행나무를 마주한다.

미르카페

천년 고찰 용문사의 흥망성쇠를 경험하며 무려 1000년 이상 이곳의 터줏대감으로 자리한 은행나무. 이제는 그 나이를 어찌할 수 없는 듯 고사 위기를 모면하고자 가지치기를 당해, 60m가 넘던 높이가 많이 낮아졌다고 한다.

높이는 낮아졌지만 천년 넘는 세월을 지켜 온 고고함은 여전하다. 골 깊은 용문산의 품에 안겨있는 고즈넉한 용문사 숲길의 계곡물 소리가 가을의 청량함을 더해 준다.

글·사진 = 정용식 ㈜헤럴드 상무

정리 = 민상식 기자

ms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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