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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방연, 청령포 단종 호송? “사실은..시조 제목”[함영훈의 멋·맛·쉼]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王邦衍은 일국의 왕이 강물에 흐르다는 뜻”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강원도 영월은 작은 소도시에 미술관-박물관을 28개나 가졌고, 어라연, 요선암, 동강, 서강, 선돌, 별마로 천문대의 별밤 등 청정 자연·지질 명소도 국내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많다.

고려-조선의 기준으로 보면 오지에 속하지만, 요즘 기준으론, 호젓하게 자연과 인문, 예술을 감상하며 쉴 수 있는 ‘토털 여행’지이다.

단종이 갇힌 자연 감옥 청령포는 남한강 최고 비경 중 하나이다.

영월군 남면 광천리는 오대산에서 발원한 동강이 어라연을 거친 뒤, 단양쪽에서 올라온 남한강과 합수되는 지점이다. 이곳엔 물이 크게 휘돌아 서울로 가는 물목, 청령포가 있다. 영월 사람들은 이 지점을 서강 초입이라고도 한다.

▶청령포, 비경이라 더 서럽다..지금은 힐링 솔숲= 청령포는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서쪽은 험준한 육륙봉 암벽이 솟아 있어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밖으로 출입할 수 없는, 마치 섬과도 같은 곳이다.

‘한국의 투탕카멘’ 같은 짧은 생애, 비운의 소년왕, 단종(재위 1452∼1455)이 작은아버지 수양에 의해 이곳에 갇혔다. 단종은 자신이 홀로 위리안치된 이곳을 ‘육지고도(陸地孤島)’라고 했다.

청령포 솔숲

나룻배를 타고 청령포로 들어가는 사이, 강변에서 아빠와 함께 물수제비하며 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정겹다.

재위 기간이 긴 세종은 아들 문종과 가끔 놀아주었지만, 재위 기간이 짧은 문종은 아들 단종과 그리 많이 놀아주지 못했다. 문종은 자기 아랫동생 수양이 자기 아들이자 수양의 조카인 노산군(단종)을 그렇게 참혹하게 죽이리라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청령포에는 단종이 그곳에 살았음을 말해 주는 단묘유지비와 어가, 단종이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고 전하는 노산대, 한양에 남겨진 정순왕후를 생각하며 쌓은 돌탑, 외인의 접근을 금하기 위해 영조가 세웠다는 금표비가 있다.

관음송 돌이

또한 단종의 유배처를 중심으로 주위에 수 백년생의 거송들이 울창한 송림을 이루고 있는데, 특히 천연기념물인 관음송은 단종이 걸터앉아 “내가 이럴려고 왕이 되었던가”라고 하소연하던 나무이다. 관음송은 단종 유배때 부터 꽤나 덩치가 있어 단종이 부여잡던 나무였다고 하니, 수령이 족히 최소 700년은 넘었으리라 추정된다.

관음송이 왕 나무가 되어 거느리는 이 숲은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단종 사후, 그를 추모하는 ‘관음송 돌이’ 행렬이 이어졌고, 숙종-영조-정조 때 완전히 복권된 후 어느 때 부터인가 억울한 일의 사필귀정, 소원 빌기 명소가 되었다고 한다. ‘관음송 돌이’는 시계반대 방향으로 해야 한다.

청령포 입구 단종과 정순왕후, 손에 손잡고 동상. 정순왕후는 시숙에 의해 국모의 지위에서 노비로 강등된 된 조선 유일의 사례이다. 그녀의 생활수단 바느질은 솜씨좋은 공예작품으로서 최근 재조명되고 있다.

▶조선초 왕씨가 무관 고위직이라고? 왕방연의 정체는?= 청령포는 고교생 이상 국민 대다수가 잘 아는 시조,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애달프다)’라는 시조의 무대이다.

왕방연(王邦衍)이 호송 금부도사로서 지은 시라고 알려져 있지만, 영월 향토사학자들 사이에선 왕방연이 사람 이름이 아니라 후대에 붙여진 ‘시조의 제목’(일국의 왕이 강물에 흐르다)이라는 주장이 나와 눈길을 끈다.

향토사학자들에 따르면, 이 시조의 한시 원문은 ‘천리원원도(千里遠遠道) 미인별리추(美人別離秋) 차심미소착(此心未所着) 하마림천류(下馬臨川流)천류역여아(川流亦如我) 오열거불휴(嗚咽去不休)’ 6연의 5언절구이다.

청령포 내 단종의 위리안치 지점

한 향토사학자는 “영월에서 구전되던 노래를 1617년 병조참의 김지남이 한 여인에게 부르도록 해, 이를 오언절구로 정리한 뒤 일국의 왕이 강물에 흐르다(王邦衍)는 뜻으로 제목을 붙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면서 “보통 시의 제목은 지을 당시 붙이는 것은 드물고, 후대에 짓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이 5언절구에 있는 왕방연은 시의 제목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했다.

즉 그의 설명을 부연하면, ▷고려 역사 말살을 꾀하느라 이성계와 그 추종 세력이 수십년간 조직적으로 왕씨들을 학살했기 때문에 벼슬길로 나서는 문과급제자가 처음 나온 것이 1453년 왕희걸이었다는 점, ▷왕씨에게 문과의 하급직은 몰라도 무과의 높은 자리(왕방연의 직책으로 알려진 금부도사)를 줄 리가 없었다는 점, ▷왕방연이라는 인물에 대해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는 점, ▷임금 왕(王), 나라 방(邦), 물흐를 연(衍)은 사람이름에 적합지 않다는 점, ▷비슷한 내용의 구전가요가 영월 여인들, 아이들 사이에 불려졌다는 점이, 왕방연은 사람(작가)이름 아닌 시조 제목이라는 근거이다.

서슬 퍼렇던 시절, 게다가 고려의 왕씨 성을 가진 호송 간부가 감히 당대 문신들 앞에서 이런 한탄을 읊조렸을 가능성은 매우 적다는 것이다.

영월 장릉의 단종-정순왕후 귀여운 조형물과 핑크빛 수련

▶세계유산 장릉의 기형적 구조= 단종은 청령포에 있다가 영월부 관아 관풍헌으로 옮겨진뒤 1457년 수양대군으로부터 사약을 받았으나 거부하다 관원들에 의해 피살됐다. 그가 조부 세종-부친 문종의 DNA를 이어 성군이 되었다면 조선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른다.

친조카를 왕위에서 내쫓고 무참하게 살해 까지 한 수양의 유혈 쿠데타 이후 조선왕실은 엉망이 된다.

7~16대 임금 재위 200년간 수양의 병마, 잇달은 세자와 왕의 요절, 두 번의 반정, 계속된 사화, 잦은 환국의 피바람이 불었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으며, 결국 왜군-청군의 침략을 받고 말았다.

장릉은 단종의 무덤으로,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장릉 주위의 소나무는 모두 능을 향해 절을 하듯 굽어있다. 17세에 죽임을 당한 단종의 시신은 동강에 버려졌지만 영월의 호장 엄흥도가 몰래 수습하여 지금의 장릉터 동을지산 자락에 암장하였다.

오랫동안 묘의 위치조차 알 수 없다가 1541년(중종 36) 당시 영월군수 박충원이 묘를 찾아내어 묘역을 정비하고, 1580년(선조 13) 상석·표석·장명등·망주석 등을 세웠다. 1681년(숙종 7) 단종은 노산대군(魯山大君)으로 추봉되고, 1698년(숙종 24) 11월 단종으로 추복되었으며, 능호는 장릉(莊陵)으로 정해졌다.

영월 장릉 홍살문에서 어도를 지나 정자각에 가는 길은 ‘ㄱ’자로 꺾여 있다.

흔히 왕릉의 구조는 홍살문을 지나 어도-정자각-능까지 일직선이어야 하지만, 영월 장릉은 ‘ㄱ’자로 꺾여 있고 다른 능에 비해 작다. 능은 정자각에서 바로 오르기 어려울 정도로 가파른 곳에 있고, 정자각과는 수직으로 배치된 기형적 구조이다. 엄홍도가 매장한 곳을 그대로 왕릉 격으로 리모델링했기 때문이다.

▶정령송의 신비= 이곳을 방문하면 정자각에서 왕에 대한 제례법을 배우고, 조선 역사 최초로 국모가 노비로 강등된 정순왕후-단종 부부의 조형물 앞 연못에서 수련의 아름다운 자태를 감상한다.

능으로 가려면 홍살문을 다시 나와야 한다. 젯밥을 준비하는 재실 근처에서 다시 등산하듯 언덕위로 올라 능 앞에서 다시 재배한다. 조선의 어떤 왕릉보다 가슴 시린 산책을 하게 된다.

단종 능으로 가려면 홍살문을 나와 다시 낮은 산을 7분 가량 등산해야 한다. 예를 갖추는 정자각이 가파른 절벽 아래에 있고, 봉분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언덕 깊숙한 곳에 있다. 급히 시신을 수습해 가매장한 곳이 왕릉이 됐기 때문이다.

단종 역사관에는 단종의 탄생부터 17세에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대기를 기록한 사료가 전시되어 있다. 또 창덕궁을 지나 강원도 영월에 이르기까지 단종의 유배 경로를 표시해둔 사진을 통해 단종의 발자취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청령포의 옛 사진과 유배를 갈 당시에 관리들과 단종의 모습을 재연해 놓은 밀납 인형도 전시되어 있다. 단종 역사관을 나와서 길을 따라 걸으면 단종능으로 산책로가 이어진다.

단종과 관련된 곳 마다 소나무가 감정을 가진듯 신비한 모양 변화를 보이는데, 청령포와 장릉, 정순왕후의 사릉 세곳 모두에 정령송(精靈松)이 있다. 영월쪽으로 기울어지던 사릉의 소나무는 결국 장릉으로 옮겨 심었더니 바로 섰다고 한다. 장릉의 소나무도 사릉으로 장가갔다고 한다.

영월 요선암
요선암 돌개구멍중 ‘쉼표’ 포트홀

▶침통하기만 할 새가 없는 영월 버라이어티 매력= 주천강과 법흥천의 합류지점 무릉도원면에 있는 천연기념물 요선암은 강한 물살에 바위들이 매끈하게 풍화되고, 돌개구멍이 생긴 이색 지질 지대이다. ‘신선을 맞이하는 바위’라는 뜻이다. 가장 큰 돌개구멍은 쉼표를 선명하게 새겨놓았다.

요선암 옆 하식애 꼭대기 바위산에는 요선정 정자와 복주머니처럼 생긴 돌에 새긴 마애불, 석탑이 멋들어지게 올라서 있다. 신라때 암자가 있던 자리로 전해지며, 숙종-영조-정조 세 임금의 글이 걸려 있는, 작지만 강한 역사유적이자 쉼터이다. 바위산 꼭대기 탁 트인 전망도, 가을을 부르는 시원한 바람도, 마을사람들이 일본으로 빼돌려질 뻔한 왕들의 시 현판을 지켜낸 일화도 감동적이다.

영월 젊은달 와이파크
영월 선돌의 가을 풍경

영월에는 이밖에도 대한민국 한반도지형 마케팅의 원조인 한반도면, 김삿갓 유적, 국가지정 명승 동강 어라연, 10월 동강 둔치에 피는 붉은메밀꽃밭, MZ세대 핫플레이스 젊은달와이파크 쉼터미술관, 제작 기간 6억~3억년이 걸린 고생대 지질 작품 ‘선돌’, 별마로천문대, 올챙이국수와 배추전으로 유명한 서부시장, 고을 주민의 지혜를 엿보는 조립식 섭다리, 탄광문화의 전승지 화석박물관, 종교미술박물관 등 여행할 만한 곳들이 많다.

그래서 단종 인문학여행 때의 시린 가슴이 매우 신속하게 명랑·쾌활로 바뀐다. 그 만큼 영월여행은 다채롭다는 뜻이다.

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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