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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휴머니즘, 리얼리즘 품은 청년의 상징”…학전에서 떠난 거목 김민기
故 김민기, 학전에서 마지막 산책
황정민 설경구 등 ‘아침이슬’로 추모
“휴머니즘, 리얼리즘 품은 청년의 상징”
대학로 소극장의 상징 '학전'을 30여년간 운영하며 후배 예술인을 배출해 온 가수 김민기의 발인식이 엄수된 2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아르코꿈밭극장에서 유가족과 참석자들이 추모 묵념하고 있다. [연합]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아침이슬’ 중)

“나는 뒷것이다. 나를 자꾸 앞으로 불러내지 말라”던 한국 문화예술계의 거목 김민기(1951~2024)가 24일 영원한 안식에 들었다. 지상에서 그의 마지막 걸음은 공연기획자로 일생을 헌신한 학전이었다.

이날 오전 서울대학교 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수된 발인식 이후 고인은 대학로 아르코꿈밭(옛 학전 자리)으로 향했다. 고인이 떠나는 길엔 내내 비가 내렸지만, 그의 마지막을 배웅하려는 사람들은 옛 학전 앞으로 모여들었다. 학전 ‘독수리 5형제’로 불린 설경구 장현성 황정민을 비롯해 장례에서 상주 역할을 하며 사람들을 두루 챙긴 가수 박학기, 배우 방은진 최덕문 배성우, 고인과 절친한 유홍준 명지대 석좌 교수가 마지막을 함께 했다. 유가족이 영정을 안고 학전 앞으로 들어설 땐 슬픔의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옛 학전 마당 화단으로 고인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묵념을 한 뒤, 영정은 학전 공간 곳곳을 천천히 둘러봤다. 오랜 시간 고인과 함께 해온 사람들은 ‘아침이슬’을 목놓아 부르며 그를 떠나보냈다.

학전 앞 생전 김민기 [최규성 평론가 제공]

한국 ‘최초’의 싱어송라이터이자, 대학로 소극장 문화를 일군 ‘학전’을 이끈 김민기는 스스로를 ‘뒷것’이라 했지만, 그가 남긴 족적은 문화예술계에 깊이 남았다.

고인은 1970년대, 엄혹한 시절 ‘청년문화의 상징’이었다. 음악을 시작한 것은 1970년이었다. 친구 김영세와 포크 듀오 도비두를 결성, 음악 활동을 시작한 그는 서울 명동 YWCA 회관 ‘청개구리의 집’에서 ‘아침이슬’을 만들었다. 데뷔 앨범이 나온 것은 1971년. 정민재 대중음악평론가는 “싱어송라이터가 없던 시절 내 이야기를 음악에 담는 자작곡 앨범을 낸 최초의 싱어송라이터”라고 했다.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그의 음악은 투쟁의 현장에서 울려 퍼졌고, 1987년 민주항쟁에서 ‘아침이슬’이 울려퍼지며 그는 ‘저항 가수’라는 수식어도 안게 됐다. 그의 음악이 시위 현장에서 불릴 때마다 “내 몸에서 나간 것의 백 배가 돼 돌아오면 버겁다”며 자신을 낮추곤 했다.

최규성 대중음악평론가는 “노래를 넘어 시대의 상징으로 1970년대 청년 문화에 큰 공헌을 했다”며 “그 시대를 살았던 세대 중 김민기의 음악적 유산에 감동과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다. 모두가 김민기에게 빚은 지고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헌석 음악평론가는 “엄혹했던 한국 사회의 저항 정신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며 이후의 많은 민중 가수들에게 깊은 영감을 줬다”며 “특히 정치적 억압 속에서 청년들이 느끼는 불만과 분노, 저항의 감정을 표현하는 하나의 매개체가 됐고, 나아가 그들의 고뇌와 희망을 대변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고인과 그의 음악을 두고 ‘최초의 싱어송라이터’라는 수사, ‘시대정신’의 상징성과 더불어 ‘높은 예술성’을 가졌다고 입을 모든다. “한국 대중가요의 수준을 한 단계 높여줬다”(이헌석, 최규성 평론가)는 평가다.

故 김민기 아들 결혼식에 참석한 김형석 알리 김민기 박학기 이적 황정민 강승원 조경식 감독(아랫줄 왼쪽부터 반시계방햑) [박학기 제공]

임희윤 음악평론가는 “포크 음악의 완성도, 예술적 수준이 높은 노랫말, 플루트를 활용한 재즈적 접근 등 음악적 예술성이 높았다”며 “특기할 만한 것은 자연의 현상과 모티프를 가지고 인간적 메타포를 형성했고, 정서적으로는 슬픔이나 한의 정서를 품었고 스토리적으로는 고난의 이야기를 담았다”고 봤다. 정민재 평론가는 “우리 시대는 김민기라는 사람과 음악이 있어 축복이었다”며 “고인의 음악은 시대를 비추는 등불이면서도 위대한 표현력으로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아름다움과 휴머니즘을 안고 있다”고 했다. 이헌석 음악평론가는 “시적이고 정적이며 사색적인 노래는 대중가요를 견실하게 해줬다”고 봤고, 최규성 평론가는 “은유적인 그의 가사엔 진실함이 담겨있다. 리얼리즘에 입각한 그의 음악엔 처절한 고독과 전쟁에 대한 공포가 짙게 담겼다”고 했다.

1970년대를 살아온 젊은이들에게 고인이 ‘저항의 아이콘’이었다면 1990년대 이후의 그는 ‘대학로의 상징’이었다. 학전은 실험적 연극과 뮤지컬, 어린이극을 올리며 다양한 세대를 아울렀다. 특히 1994년 초연된 독일 원작의 록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한국 창작뮤지컬의 출발 격으로 지난해까지 무려 8000회나 무대에 올랐다.

음악공간으로의 역할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학전은 TV 밖 대중음악인들을 발굴하는 요람이었다. 임희윤 평론가는 “한국 가요사의 중요한 분기점이었던 1990년대는 플랫폼이 단일화됐던 시기로 조용필 서태지 현철 룰라 등 다양한 장르의 주류 가수들이 TV에서 경쟁하고 있었다”며 “이 시기 상대적으로 조명을 덜 받은 실력파 가수들이 설 수 있는 곳이 학전이었다”고 했다. ‘대학로에 가면 OOO이 있다’며 입소문이 난 ‘신화적 존재’ 중 한 명이 김광석이다. 라이브에 정평이 난 윤도현 나윤선을 발굴하고 수면 위로 끌어올린 곳도 학전이다. 최규성 평론가는 “학전을 통해 소극장 공연의 붐이 일었고 대학생부터 넥타이를 맨 직장인까지 퇴근 후 대학로로 몰려갔다”며 “김광석 같은 가수가 1000회 공연을 달성하며 스타로 태어난 학전이 있었기에 대학로가 소극장 공연의 메카가 될 수 있었다”고 했다.

22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 장례식장에 가수 고(故) 김민기(극단 학전 대표)의 빈소가 마련돼 있다. [연합]

학전에서 시작한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는 오프라인에서 인기를 얻어 매체로 간 대표 사례다. 임 평론가는 “당시의 청년문화를 대변한 이 공연이 공중파까지 편성돼 ‘이소라의 프로포즈’, ‘유희열의 스케치북’, ‘지코의 아티스트’까지 이어졌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봤다.

김민기가 떠난 자리엔 수많은 사람들의 그리움이 남겨졌다. 학전 출신 가수 윤도현은 “아버지 같은 존재이자, 존경하는 음악가 김민기. 언제나 제 마음속에 살아 계실 김민기 선생님. 학전도 선생님도 대학로도 많이 그리울 것 같다”고 했고, 이적은 “나의 영웅, 감사하다”고, 더클래식 김광진은 “많은 것을 배우고 싶은 분이었다. 음악도 삶도, 따뜻한 격려도 기억한다. 사랑한다”고 했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김민기 선생은 우리 시대를 잘 대변하는 예술가였다”며 “고인의 정신이 깃들어있는 학전이 비록 그 이름이 아르코꿈밭극장으로 바뀌었지만, 고인의 뜻이 잘 이어갈 수 있도록 한국문화예술위원회를 통해 학전을 잘 가꾸어 나가겠다”고 말했다.

지난해 가을 위암 4기 판정을 받고 투병해온 고인은 최근 건강이 악화, 지난 21일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천안공원묘원에 봉안된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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