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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혜리가 먹던 케이크, 끝이라고?…버터크림 케이크의 ‘고귀한 죽음’ [미담:味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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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통해 세상을 봅니다. 안녕하세요, 맛있는 이야기 '미담(味談)'입니다.
[tvN ‘응답하라 1998’ 영상 갈무리]

[헤럴드경제=채상우 기자] 고귀한 죽음을 앞두고 있는 음식이 있다. 1980~1990년대 행복한 순간을 함께 했던 버터크림 케이크의 이야기다.

음식이 사라지는 것에 ‘고귀한 죽음’이라고 거창한 수식어를 붙이는 데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음식에게도 인간의 삶과 같은 일생(一生)이 존재한다. 탄생을 하고 화려한 황금기를 거쳐 사람들이 찾지 않는 그때가 되면 조용한 죽음을 맞이한다. 인간의 죽음이 저마다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듯, 음식 역시 그렇다. 선(善)한 사람의 죽음은 사회에 긍정적 씨앗을 틔우는 데 밑거름이 된다. 사람들은 이를 고귀한 죽음이라 부른다.

버터크림 케이크의 삶은 어땠을까.

[온라인커뮤니티 갈무리]

풍족하지는 않았던 시절, 버터크림 케이크는 한국에 케이크를 대중화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는 한국의 케이크 시장이 성장하는데 큰 밑거름이 됐다.

우리가 기억하는 모양의 버터크림 케이크가 한국에 대중화되기 시작한 건 1980년대 초로 추정하고 있다. 버터크림은 생크림에 비해 단단해 모양을 잡기 쉽다. 외국에선 버터크림으로 화려한 모양을 만들고 색을 입혀 연회를 장식하는 용도로 많이 사용해 왔다.

한국에서는 생크림 케이크를 그대로 본딴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이는 당시 시대상황과 맞물려 있다. 책이나 만화, 외화 등을 통해 생크림 케이크를 처음 접한 한국인에게 접근하기 쉬운 형태였을 뿐 아니라, 비용면에서는 생크림보다 월등히 저렴했다. 비싼 버터 대신 쇼트닝이나 마가린을 섞어 만들기도 했다.

버터크림 케이크는 가파른 경제 성장만큼이나 빠르게 인기를 끌어 1980년대 후반부터 황금기를 맞이한다. 생일파티나 기념일에 대접만큼이나 커다란 버터케이크를 상 위에 놓는 건 흔한 한국 가정의 풍경이었다.

화려한 모습의 케이크들 [SPC]

1990년대 중반 이후 소득수준 증가와 함께 해외 교류도 활발해지면서 한국인들도 진짜 생크림 케이크 맛에 눈을 뜨게 된다. 버터크림에 비해 덜 느끼하고 상쾌한 느낌에 부드러움을 느낄 수 있는 생크림은 빠르게 대세로 자리잡았다. 성장을 거듭한 한국의 케이크 시장은 이제 빠르게 선진국을 추격하고 있다. 만약 버터크림 케이크가 케이크의 대중화를 이루지 않았으면, 또 다른 결과가 펼쳐졌을지 모르는 일이다.

정봉아 이제 그 케이크를 더는 못 먹을지 몰라
[채상우 기자]

몇 해 전 케이블 채널 tvN의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정봉이 역을 맡은 안재홍과 덕선이 역을 맡은 이혜리 배우가 버터크림 케이크를 와구와구 먹는 모습이 화제가 된 적 있었다. 반질반질한 크림 위에 딱딱한 분홍 꽃장식, 전구 같이 빨갛게 빛나던 딸기 젤리가 올라간 그 시절 버터크림 케이크의 모습을 오랜만에 본 이들은 다시 한번 그 맛을 보고 싶어했다.

그립던 그 모습을 실제 마주하긴 쉽지 않다. 서울에서는 그 모습의 버터크림 케이크를 파는 곳이 절멸 수준에 가깝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인 태극당이 간신히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버터크림 케이크를 파는 곳이 없나 며칠을 찾아 헤맸지만, 당최 찾을 수 없었다. 포기하려던 찰나 신림동의 오래된 한 빵집에서 버터크림 케이크를 판다는 제보를 받았다.

외관부터 옛스러움이 가득하다. ‘즉석빵·생크림’이라고 적힌 네온사인 전광판, 낡은 테이블, 유선전화기, 색이 바랜 빵 사진들, 천장 모서리 한 켠을 큼지막하게 차지하고 있는 ‘맛있는 빵을 직접 고르세요’라는 안내문이 90년대로 타임머신을 탄 듯한 기분이 들게 만든다.

채상우 기자

가게를 지키고 있던 사장님의 아내분은 주위를 둘러보며 “1992년 10월 25일 이 가게를 오픈했는데, 그 뒤로 한번도 내부 인테리어를 안 바꿨어요”라고 소개했다. 사장님은 지금은 사라진 남서울호텔 제과부에서 10년 동안 일한 베테랑 제빵사다. 빵이 좋아 노년에 접어든 지금까지도 직접 매일 아침 빵을 굽는다고 한다.

[채상우 기자]

유일하게 환한 조명을 받고 있는 케이크 진열대에서 그토록 찾던 버터크림 케이크와 재회했다. 큼직했던 분홍색 장미꽃은 작은 산철쭉 모양의 꽃으로 바뀌어 있는 것 말고는 겉모습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오래 전 인연을 다시 만난듯한 애틋함마저 줄 것 같다.

초를 꽂은 뒤 버터크림 케이크를 한 조각 잘라 먹었다.

“맞아 이 맛이었지” 30여 년 만에 맛본 버터크림 케이크는 그 시절 기억 속으로 순식간에 끌어당긴다. 생크림에서 느낄 수 없는 미끈한 부드러움과 버터 특유의 풍미, 그리고 입 안을 감도는 달콤함. 반면 느끼함은 덜한 듯 하다.

[채상우 기자]

버터크림 케이크를 기억하는 이들의 막바지 세대는 30대 후반. 버터크림 케이크를 만드는 제빵사의 나이는 이들보다 곱절은 더 들었다. 제빵사가 더는 버터크림 케이크를 만들지 못하는 시기가 오면, 버터크림 케이크를 정말 추억에만 묻어둬야 할 지 모른다.

이곳 제과정 사장님 아내분은 “언제까지 우리가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하나 둘 일을 못 하게 되면 버터크림 케이크도 사라지는 거지”라고 말했다.

“아쉽지만, 그럼 안녕” 버터크림 케이크 덕분에 더 맛있는 케이크를 먹을 수 있게 됐으니, 우리는 슬프지 않게 작별 인사를 보내도 되지 않을까.

123@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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