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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홍 칼럼] 3·1 독립운동과 이승만 사이에서

3.1 독립만세 운동이 한창 번져가던 1919년 3월 17일 미국의 유력지 뉴욕타임스가 이승만의 대미국 ‘위임통치 청원’을 보도했다. “윌슨 대통령은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로부터 한국을 국제연맹이 완전한 자치정부로서 적합하다고 결정할 때까지 위임통치하면서 평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모색하는 조치를 취해주도록 요청받았다.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의 사본이 헨리 정(정한경)과 함께 주미 한국인 단체의 공식대표인 이승만에 의해 오늘 현지에서 발표되었다.”

이 위임통치 청원의 내용은 해방 후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합의한 신탁통치안과 사실상 동일하다.

이승만은 3·1운동 후 상하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공식 선출됐음에도 미국에서 임시정부 대통령 호칭을 사용했다. 이에 상하이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이며 국무총리 대리였던 안창호가 1919년 8월 25일 전보를 보낸다. “처음에 임시정부는 국무총리제이고, 한성정부는 집정관 총재제도이며, 어느 정부에나 대통령 직명이 없으므로 각하가 대통령이 아닙니다. ...헌법을 개정하지 않고 대통령 행사를 하시면 헌법 위반이니, 대통령 행사를 하지 마시오.”

다음날인 26일 상하이로 날아온 이승만의 답신은 대통령 참칭을 기정사실화하는 내용이었다. “우리가 정부 승인을 얻으려고 전력을 다하는데 내가 대통령 명의로 각국에 조서를 보냈고, 대통령 명의로 한국 사정을 발표한 까닭에 지금 대통령 명칭을 변경하지 못하겠오. 만일 우리끼리 떠들어서 행동이 일치하지 못한 소문이 세상에 전파되면 독립운동에 큰 방해가 있을 것이며, 그 책임이 당신들에게 돌아갈 것이니 떠들지 마시오.”

상하이 통합임정은 1919년 9월 이승만의 고집으로 국무원과 국무총리제를 대통령제로 바꾸는 헌법 개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임정 의정원은 1922년 6월 17일 재적 3분의 2 찬성으로 이승만 대통령 불신임안을, 이어 1925년 3월 11일 탄핵안까지 의결하고 만다. 주요 사유를 보면 “임시 대통령 직임이 국내 13도 대표가 임명한 것이라 하여 신성불가침의 태도를 가지고 임시의정원 결의를 무시하며 대통령직임을 황제로 생각하여 국부라 하며 민주주의 정신을 말살했다”면서 “재미동포의 인구세와 정부 후원금과 공채표 발매금을 전부 수합하여 자의로 처리하고 정부에 재정보고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삼일절을 하루 앞둔 2월 29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찾은 아이들이 대형 태극기 앞에서 태극기를 들어올리고 있다. [연합]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은 크게 군사무력 투쟁과 외교선전, 그리고 장기적인 민족 교육문화 운동으로 힘을 기르기 위한 무실역행으로 전개됐다. 여러 독립운동 방법론이 연대하고 통합돼야 시너지 효과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승만은 외교활동을 벌이면서 위임통치 청원에서 보듯이 독립운동의 기본정신을 훼손한 데다 또 군사무력 투쟁에 대해 비난하고 견제했다.

유한양행 창업자인 유일한은 소년기에 미국으로 건너가 기업활동을 하면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것으로 존경받는다. 그는 3·1운동 직후 서재필이 4월 13일 필라델피아에 소집한 제1차 한인연합회의에 참석했던 회고에서 “이승만이 나오더니 미국 국가를 부르자고 해서 크게 실망했다”고 썼다.

이승만은 1908년 미국에서 장인환, 전명운 의사가 친일 외교관 스티븐스를 저격해 법정에 서자 한인회가 피고인 통역 등 도움을 요청했으나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더구나 1932년 1월 이봉창 의사의 일왕 암살 시도와 4월 윤봉길 의사의 상해 의거에 대해 이승만은 “테러행위로 국제사회의 외교적 지원을 받기가 어렵다”며 상하이 임정에 반대 의사를 전했다.

한국 독립운동이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진 것은 3·1운동 자체가 피압박 민족의 항거로서 세계사에 유례 없는 민족적 역량을 분출했기 때문이다.

3.1운동에 대한 실증적 조사 자료는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와 조선총독부 문헌이 공인받고 있다. 만세시위가 가장 치열했던 3월 1일부터 5월 말까지 참가인원만 봐도 박은식은 실제 조사를 통해 202만3098명이라고 기록했다. 당시 한반도 전체 인구의 10% 이상이 만세시위에 나선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조선총독부 자료로 3·1운동 피검자가 1만9525명이었으며, 이를 사회계층별로 분류해보면 당시 인구구성비의 축소판임을 알 수 있다. 백분비로 봤을 때 ▷농민·어민 55.9 ▷지식인·학생 16.46 ▷노동자 12.91 ▷상업·자영업 6.68 ▷관리·사무직 4.23 ▷직업 미상 2.74 ▷기업가 2.45 등으로 나타났다. 남녀노소, 양반상놈, 관리와 잡역일용직 등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회계층이 한반도 전 지역에서 참가한 시민혁명이었다. 이것이 바로 3·1운동을 대외적 독립성과 함께 대내적 동질성을 형성한 종합적 민족운동으로 자리 잡게 하는 역사적 실증자료라 할 수 있다. 1919년 중국의 5·4운동에 영향을 주고 인도의 시성 타고르를 감동시킨 민족사였다. 그것은 근대 국민국가 구성원으로서 주권자 의식과 의무를 인식하는 전형적 국민형성(Nation-Building) 과정이었다. 1948년 정부 수립을 건국이라고 우기는 것은 국민형성을 국가건설로 오역하고 그것이 정부 수립 때 이뤄졌다고 보는 무지의 소산일 뿐이다.

김재홍 서울미디어대학원대 석좌교수(전 서울디지털대 총장)

raw@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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