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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친 물가에 ‘냉털’ 하려다…김밥, 이렇게 만들다간 폭망 [퇴근 후 부엌]
냉장고에 있는 자투리 재료를 할용한 김밥. 신주희 기자.

[퇴근 후 부엌]

술에 절어 해장국을 시켜만 먹다가 어느 날 집에서 소고기뭇국을 직접 끓여봤습니다. 그 맛에 반해 요리에 눈을 떴습니다. 산더미 같은 설거지가 기다리고 있지만 나를 위해 한 끼 제대로 차려먹으면 마음이 충만해집니다. 현실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한 끼에 만원이 훌쩍 넘는 식대에 이왕이면 집밥을 해먹어야겠다 결심이 섰습니다. 퇴근 후 ‘집밥러’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풀었습니다.

요리와 재료에 담긴 썰도 한 술 떠 드립니다.

[헤럴드경제=신주희 기자] 오전 6시 50분. 사무실에 들어서면 플라스틱 통에 ‘반 줄 김밥’이 차곡차곡 쌓여 있습니다. 평소 아침을 거르던 이들도 진동하는 참기름 냄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합니다. 다들 한 손으로는 김밥을 들고 눈으로는 모니터를 좇습니다. 허기지고 바쁜 새벽, 이렇게나 고마운 끼니도 없습니다.

김밥의 보관 기한은 상온 기준 8시간. 매일 아침 6시 반이면 배달되는 이 반줄 김밥은 전날 만들어둔 게 아닙니다. 누군가의 새벽잠을 뺏어 신세를 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밥만큼 먹는 이의 편의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동력을 집약한 음식도 없습니다.

15일 오전 서울 용산구 한 사무실에서 기자가 노트북을 보며 김밥을 먹고 있다. 박해묵 기자
옆구리 터진 김밥은 제발 그만…자취생 ‘냉털’ 비결

이처럼 손이 많이 드는 탓에 김밥은 자취생들이 요리하기에는 난이도가 높은 메뉴입니다. 그럼에도 자투리 채소나 남아있는 반찬을 ‘냉털(냉장고 털기)’하기엔 딱입니다.

김밥용 재료를 따로 사지 않고 집에 있는 재료들로만 김밥을 만들어 봤습니다. 밥 간만 잘 맞추면 어떤 속재료를 넣어도 하나의 음식으로 조화를 이루는 게 김밥의 매력입니다.

김밥에 들어간 재료. 신주희 기자

▶재료는 당근 4분의 1토막, 현미밥 한 공기, 닭가슴살 소시지, 양배추 5분의 1조각, 계란 2알, 맛소금, 참기름입니다.

1. 밥에 맛소금 한 꼬집, 참기름을 넣고 잘 섞어 한 김 식힙니다.

뜨거운 밥을 그대로 김 위에 올리면 김이 쪼그라들어 터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김밥용 밥은 고두밥보다는 진밥이 좋습니다.

2. 채 썬 당근에 소금을 넣고 볶습니다.

3. 가늘게 채 썬 양배추에 계란 2알을 푼 다음 소금 한 꼬집을 넣습니다. 물기가 생기지 않도록 골고루 익힙니다.

4. 김의 거친 면을 가로로 놓고 밥알을 골고루 폅니다. 찬물을 살짝 묻혀가며 펴주면 훨씬 수월합니다.

5. 김의 3분의 1지점에 볶은 당근, 양배추 계란 지단, 소시지 반 줄을 올려놓고 천천히 맙니다. 김 끝에 밥알을 묻혀 고정합니다.

6. 참기름을 바른 뒤 예리한 칼로 김밥을 썰어냅니다.

생각보다 김밥 한 줄 안에 많은 재료를 넣기 어렵습니다. 욕심을 부리는 순간 재료들이 튀어나오는 대참사가 벌어집니다. 저 역시도 소시지 하나를 통째로 넣었다가 실패를 맛봤습니다. 어렸을 때 엄마가 만든 김밥은 왜 파는 것처럼 뚱뚱하지 않냐고 속으로 볼멘소리를 했던 날을 반성하게 됩니다.

그래도 직접 만든 김밥은 까끌한 현미 밥알과 달큰한 양배추 계란이 어우러져 담백하면서도 맛있었습니다. 다소 진 밥과 재료들이 빽빽히 들어찬 회사 김밥과는 또 다른 씹는 맛이 느껴졌습니다.

사실 김밥김은 일반적으로 가로 21㎝ 세로 19㎝로 만들어져 방향을 어떻게 놓고 말든 큰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일반적으로 김밥김의 결(김의 세로선과 수직인 방향)이 미세하게 가로로 나 있기 때문에 긴 쪽을 가로로 놓으면 조금이나마 김밥을 덜 터지게 할 수 있습니다.

밥 대신 두부 등을 활용한 레시피도 종종 보이는데, 이럴 경우 수분을 잘 제거하지 않으면 처참히 실패할 수 있습니다.

〈요리 한 줄 평〉

밥알은 김 양 끝까지 골고루 붙여야 잘 썰린다.

욕심을 버려라. 김밥은 작을수록 맛있다.

재료, 도마에 물기는 절대 금물.

재료는 전날에 미리 준비해두고 김밥을 싸면 효율적이다.

[음식썰]

노고와 품이 들어간 음식인지라 김밥이 주는 정서 역시 남다릅니다. 노래 가사, 문학에도 자주 등장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지 않을까요. 대표적으로 김훈 작가의 수필집 ‘라면을 끓이며’가 기억에 남습니다. 라면을 끓이며의 ‘김밥’에 관한 대목을 소개합니다.

요즘에 김밥도 퓨전이 나와 있는데, 그 속에 치즈, 샐러드, 불고기, 게살, 소시지 따위를 넣어 뚱뚱하게 만든다. 나는 이런 김밥은 딱 질색이다. 내가 좋아하는 김밥은 그 속에 단무지와 시금치, 또는 우엉 한 줄만 넣은 것이다. 절인 무와 실파, 깻잎, 고구마순처럼 야채만으로 속을 넣은 김밥도 좋다. 이런 김밥은 씹으면 청량감이 느껴진다.

김밥 안에 하나의 주된 기둥을 이루는 맛이 있어야 하고 그 주변을 장식하는 부수적인 맛이 있어야 하는데, 중심부가 약하거나 중심부와 주변부가 뒤섞인 것은 좋은 김밥이 아니다. 햄버거는 그 두꺼운 볼륨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하마처럼 입을 벌려서 입안으로 밀어넣어야 하지만, 김밥을 먹는 행위의 즐거움은 에센스들을 동그랗게 모아놓은 음식을 입안으로 쏙 집어넣는 그 경쾌함에 있다.

김훈 '라면을 끓이며' 中

김밥은 자고로 속 재료가 화려하기보다 밥에 충실해야 한다는 얘기로 들립니다. 옛날 집에서 만든 김밥은 (소풍 도시락이 아닌 이상) 냉장고에 남은 재료를 털어다가 만드는 김밥이었기 때문일 테죠. 또 김훈 작가는 가게에 혼자 불쑥 들어가 먹는 김밥의 쓸쓸함을 얘기합니다.

이렇듯 김밥은 서민들의 정서를 대변하는 음식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언제부터 김밥이 이렇게 우리에게 애틋한 음식이 된 건지 궁금해집니다. 어느 나라가 김밥의 원조인지 승자를 가려줄 거라 기대하고 들어온 독자 분들께는 죄송합니다만, ‘내 것’과 ‘네 것’을 가리기 위해 음식의 기원을 따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음식만이 쌓아온 정서가 충분하다면 그 문화권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김이 왜 이렇게 커”…정조가 ‘극대노’한 진짜 이유
광양 김의 시초이자 국내 최초로 김양식에 성공한 김여익. 1640년 광양시 태인동 앞바다에 떠다니던 밤나무 가지에 해초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김 양식법을 개발했다. 인조가 광양의 김여익이 진상했다는 말에 그의 성을 따 '김'이라고 부르도록 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김이 대중화된 시기는 조선 후기 때로 추정됩니다. 삼국유사에 해초(海菜藻)를 먹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그것이 김인지는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해의(海衣, 김의 옛말)은 1425년 ‘경상도지리지’ 에 토산품으로 소개되면서부터 공식 기록에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까지만해도 서민 밥상에 오르내리는 대중적인 식재료는 아녔습니다. 오히려 바닷가 지역의 백성들은 김 진상으로 고통 받았습니다. 조선 후기 효종은 “대해의(큰 김) 1첩이 목면 15~20필 값이니 진상하지 말라”고 지시하기도 했죠(효종실록, 1650년). 1첩은 20장으로 당시 마른 김 1장은 26.3g 정도였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김 한 장이 오늘날 마른 김의 10장의 무게와 맞먹습니다. 이때부터 왕실에서는 마른 김을 규격화하고 소해(작은 김)을 생산할 것을 지시합니다. 진상용뿐 아니라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인 제향에서도 대해의를 사용하지 말라고까지 명했습니다.

사실 효종이 이렇게 지시한 것은 마른김 제조에 드는 노고를 덜기 위한 면도 있었지만 대해의가 위생적이지 못하고 품질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개선하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합니다.

정조는 김 규격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진상한 수령을 관직에서 파직시키기까지 했습니다. 1792년 정조는 경상도의 한 고을에서는 유둔(기름을 먹인 종이)보다 넓은 김을 봉진한 경상도의 한 고을 수령과 관찰사에게 해임이라는 이례적인 엄벌을 내렸습니다. 유둔은 길이 73.4㎝ 너비 70.4㎝가량으로 지금으로 치면 신문지를 펼친 면보다 큰 김을 바친 셈입니다. 정조가 백성들의 고충을 고려해 본보기를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정월 대보름에 먹는 김복쌈. [KBS 한국인의 밥상]

김이 지금처럼 밥 반찬에 매일 오르지는 않았지만 조선시대 후반부터는 백성들도 김과 밥 형태로 김을 즐겨 먹었던 모양입니다. 1849년에 쓰인 ‘동국세시기’에는 ‘김쌈’과 ‘복쌈’이 언급되는데, 정월 대보름에 밥과 다양한 반찬을 김이나 야채에 싸서 먹었다고 합니다. 18세기 후반의 요리책 ‘시의전서’에는 사람들이 김에 기름을 바르고 소금을 뿌려 먹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김에 밥을 싸서 먹었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의 복쌈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김밥의 형태와는 조금 다릅니다. 재료를 층층이 넣었지만 복주머니처럼 싸서 오히려 주먹밥 모양에 가까웠지요.

김밥, 언제부터 서민 음식이었을까?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이 1917년 완도에 해태(김) 양식 시험소를 설립하고 어민들에게 일본식 김 양식, 가공법을 보급했습니다. 물론 생산한 김을 대부분 수입해 가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김을 가공할 때 대판 가로 22.7㎝ 세로 19.7㎝ 규격으로 정했다고 합니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

오늘날 우리가 먹는 김밥김 규격은 가로 21㎝, 세로 19㎝인데, 이때부터 마른 김의 크기가 ‘개량식'으로 굳어진 것이죠. 또 본격적으로 도시락 문화가 퍼지면서 오늘날 재료를 밥에 넣고 말아낸 김밥이 보편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관청에서 식사를 제공했던 데 반해, 일제강점기에는 직원들이 점심을 식당에서 먹거나 도시락으로 해결했습니다. 학생들도 학교를 다니면서부터 점심을 싸오게 됐죠. 이때부터 ‘김발’을 이용한 일본식 ‘노리(김)마키’가 요리법이 신문이나 각종 책에 소개됩니다. 일본에서 자주 사용하는 식재료인 간뾰(박고지 조림), 표고조림, 생선살을 재료로 하고 아지노모도(조미료)와 초대리(단촛물) 등으로 간을 한 게 특징입니다.

한편 일본은 1776년 간사이지방 요리책에 노리마키 만드는 법이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신찬식단부류집’에는 김발에 아사쿠사 김 또는 복어 껍질을 깔고 밥을 놓고 생선살을 늘어놓은 다음 김발로 감아 만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들어간 식재료만 살펴봐도 일제강점기 때의 김밥은 상류층에서 먹는 음식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김밥은 점차 서민 음식으로 탈바꿈합니다. 특히 김밥은 열차 이동이나 보행 중에 손쉽게 허기를 달래는 데 적격이었습니다. 1949년 6월 8일자 경향신문 ‘열차 내의 장사꾼’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면 13세 내외 소년 소녀들이 비좁은 차내 통로를 오가며 ‘담배 사세요’, ‘떡 사세요’, ‘김밥 사세요’ 하며 피곤한 여객들을 괴롭게 한다고 묘사합니다. 이들이 파는 음식은 대개 비위생적이라 당국이 감독해야 한다고 덧붙입니다. 해방 이후 배를 곯는 국민들이 찾는 음식 중 하나가 김밥이었던 것입니다.

〈참고 문헌〉

조선시대 역사기록서에서 마른 김의 기록과 규격 분석 KCI (한국해양수산개발원)

식탁 위의 한국사 (주영하)

라면을 끓이며 (김훈)

joo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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