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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짓밟히면서도 소리내고 옳음을 지키려 고통받는 자, 바로 ‘와이프’”
소녀시대 수영의 첫 연극 도전작
오는 26일 대학로 JTN아트센터 개막
첫 연극 도전에 나선 소녀시대 수영 [글림컴퍼니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이쪽은 에릭, 제 와이프예요. 제가 와이프라고 하는 건 성공한 느낌의 그 와이프는 아니고. 쉽게 나의 비밀스러운 남자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우리는 우리의 관계를 정의할 수 있는 새로운 급진적인 단어가 필요해요.” (‘와이프’ 아이바의 대사)

1988년 영국의 한 술집. 연극 ‘인형의 집’을 보고 나온 성소수자 커플 아이바와 에릭은 연극 배우 수잔나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이 곳엔 자신의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아이바와 자신을 감추려 하는 에릭이 있다. 시선을 피하며 흔들리는 에릭의 눈은 에이즈가 창궐하고, 성소수자를 혐오하던 시절의 공포와 두려움을 온전히 담아낸다.

“제가 와이프라고 말할 때 이게 더 편리해서일까요? 아니면 가부장적 제도로부터의 탈환? 단지, 아직 단어가 없는 것 뿐이에요. 현대의 성 정체성과 젠더는 이분법으로 분리할 수 없으니까요.” (‘와이프’ 2023년 카스의 대사)

2023년, ‘인형의 집’을 관람하고 온 예비 부부 클레어와 핀. 클레어는 연극 제작자이자 자신의 아버지인 에릭이 사랑했던 연인 아이바를 만난다. 아이바는 이미 동성 연인 카스와 결혼해 가정을 꾸린 상황. “아빠에 대해 말해달라”는 클레어에게 아이바는 과거의 연인 에릭을 모르는 사람 취급한다. 그 와중에 달라진 ‘인형의 집’의 성별을 놓고 ‘차별의 역사’를 살아온 여성과 성 소수자의 의견은 충돌한다.

연극 ‘와이프’(12월 26일 개막·LG아트센터 서울)의 연출을 맡은 신유청은 13일 오후 서울 대학로 JTN아트센터 연습실에서 기자들과 만나 “와이프라 불리는 사람들은 사회 속에서 가장 힘이 없는 존재”라며 “짓밟히면서도 소리를 내고 싶고, 옳음을 지키기 위해 고통받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단어가 와이프”라고 말했다.

송재림 박지아 [글림컴퍼니 제공]

영국 출신 극작가 새뮤엘 애덤슨의 작품인 ‘와이프’는 2019년 국내 초연, 동아연극상 3관왕에 오른 화제작이다. 1959년, 1988년, 2023년, 2046년. 각기 다른 네 시대를 살아가는 네 커플을 통해 여성과 성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인식의 변화를 담아낸 작품. 각 시대의 연결고리는 최초의 페미니즘 연극으로 불리는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1897년)이다. 이 작품에 대한 시대별 재해석은 성 소수자들이 살아온 시간과 이들에 대한 시선의 변화를 보여주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각각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긴밀히 연결돼있다. 각 시대마다 성 소수자의 계보가 이어지며 ‘혈연’으로 엮여있다. 가부장 시대인 1959년을 살아가는 데이지는 연극배우 수잔나와 사랑에 빠지는 레즈비언, 데이지의 아들이 1988년과 2023년의 아이바, 아이바가 한 때 사랑한 에릭의 딸이 2023년의 클레어, 클레어의 딸이 2046년의 데이지. 네 세대를 통해 이어지는 소수자의 투쟁과 시선이 관객을 흡인력 있게 잡아끈다.

세 번째 무대를 앞둔 ‘와이프’엔 현재 얼굴과 이름을 알린 배우들이 총출동했다. ‘더 글로리’에 나온 박지아, 영화 ‘마약왕’ ‘남산의 부장들’의 김소진을 비롯해 정웅인·송재림·소녀시대 최수영이 함께 한다. 최수영은 이 작품을 통해 첫 연극에 도전한다. 흥미로운 것은 남자친구인 배우 정경호와 마찬가지로 연극 데뷔작이 신유청 연출의 작품이라는 점이다. 최수영은 ‘와이프’에서 1인 3역(959년 데이지, 2020년 클레어, 2042년 데이지)을 한다.

최수영은 “매일 모든 것이 어렵고, 어려우면서도 새롭다. 내가 이렇게 규칙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나 자신을 찾는 과정을 겪고 있다”며 “출연을 제안받고 두려움과 설렘이 동시에 들었다. 무대에 서고 싶다는 얄팍한 도전 정신을 가지고 함께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배우 정웅인 [글림컴퍼니 제공]

‘와이프’는 배우들에게 쉬운 작품은 아니다. ‘와이프’의 드라마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연극이 담아내는 차별과 폭력, 편견의 시선을 자신의 시각으로 받아들이며 곱씹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수영은 “이러한 억압을 당해본 적이 없어, 대본의 깊이가 어디까지인지 무척 알기 어렵다. 그럼에도 방대한 시대와 빽빽한 논쟁 속에서 인물들이 자기 자신을 찾으려 노력하는 정신이 좋았다”며 “다양한 인물을 보며 누구라도 자신과 닮은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나 역시 어느 날엔 이 캐릭터, 어느 날엔 저 캐릭터에 대입해보고 거울 치료를 하며 깨달음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네 개의 시대를 통해 소수자의 이야기를 꺼내든 것은 이들의 자유가 ‘투쟁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지난한 투쟁 끝에 마주한 현실은 누군가에겐 일곱 빛깔 무지개이지만, 누군가에겐 진보가 아닌 퇴보의 시간이다.

인권 신장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적극적인 ‘슈퍼 게이’에서 ‘꼰대 게이’가 된 중년 아이바를 연기하는 정웅인은 작품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고 했다. 그는 “연출이 아이들과 아내에게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더라”며 “아이바라는 캐릭터를 통해 삶의 변화가 작게나마 시작됐다는 느낌이 든다. 제가 꼰대라서가 아니라 아빠로, 남편으로 살아가는 삶에 변화를 준 느낌이라 대본 공부를 많이 하고 있다”고 말했다.

작품은 결국 인간으로의 정체성을 이야기한다. 시대가 변하더라도 변치 않아야 하는 것, 진짜 나를 찾아가는 여정을 담는다. 어제의 이야기이자, 오늘 그리고 내일의 이야기다.

신 연출은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고 안전한 세계처럼 보이는 삶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라며 “내 주변의 누군가가 느끼는 고통을 들여다보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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