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바리톤 김기훈, ‘클래식 음악의 심장’에서 우리 가곡 부른다
11월 영국 위그모어홀에서 데뷔
BBC 카디프 우승으로 얻은 값진 기회
바리톤 김기훈이 클래식 음악계의 심장인 영국 위그모어홀에서 데뷔, 한국 가곡을 들려주는 리사이틀을 연다. [아트앤아티스트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한국인 성악가 김기훈이 전 세계 ‘클래식 음악의 심장’인 영국 위그모어홀에 선다. 2년 전 세계 최고의 성악 콩쿠르인 ‘BBC 카디프 싱어 오브 더 월드’ 아리아 부문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한 이후 처음이다.

“BBC 카디프 콩쿠르 이후 제 노래를 진득하게 듣고 계시는 외국 분들이 계셨는데, 그 분들 앞에서 노래할 수 있게 돼 기쁩니다.”

해외 일정을 마치고 귀국한 김기훈은 최근 기자들과 만나 “외국에서 리사이틀을 하는 것 자체가 처음이라 긴장이 많이 된다”며 설레는 마음을 전했다.

내달 26일 예정된 위그모어홀 데뷔는 ‘성악 콩쿠르’의 끝판왕으로 불리는 BBC 카디프 우승으로 안게 된 절호의 기회다. 당시 콩쿠르에서 김기훈을 눈여겨 본 위그모어홀 관장이 ‘초청 독주회’를 제안해 성사됐다. 위그모어홀 공연에 앞서 내달 4일엔 예술의전당에서 한국 관객들과의 만남도 준비 중이다.

프로그램의 구성도 특별하다. 브람스의 ‘4개의 엄숙한 무대’를 비롯해, 성악가 흐보로스토프스키를 오마주 하고자 라흐마니노프의 가곡을 준비했다. 흐보로스토프스키를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김기훈은 그의 음악성과 따뜻한 성품을 좋아한다. 보통 성악가들은 러시아어로 쓴 가곡이 익숙지 않지만, 김기훈은 지난 2019년 2등을 차지했던 차이콥스키 콩쿠르를 준비하면서 유튜브로 러시아어를 공부했다.

이번 공연에선 이원주의 ‘연’(緣)과 ‘묵향’, 조혜영의 ‘못잊어’ 등 한국 가곡도 세 곡이나 준비했다. 그는 “제가 국뽕도 좀 있다”며 웃었다. 그러면서 “BBC 콩쿠르 가곡 부문 1차 예선 이후 심사위원들이나 관객들이 ‘한국 가곡 제목이 뭐냐, 어떻게 읽냐, 어떤 의미냐, 한국에 이렇게 좋은 곡이 있었냐’며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많았다”며 “한국 가곡엔 한국적인 색깔과 스타일이 있는데, 그 색채를 외국 음악 팬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바리톤 김기훈이 클래식 음악계의 심장인 영국 위그모어홀에서 데뷔, 한국 가곡을 들려주는 리사이틀을 연다. [아트앤아티스트 제공]

사실 100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 가곡 중 세 곡을 고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중 ‘못 잊어’는 김기훈이 비 오는 날 틀어 놓고 우수에 젖게 되는 곡이다. 이 곡을 들을 때마다 “자꾸 눈물이 난다”고 한다.

BBC 콩쿠르 우승 이후 가장 큰 수확은 성악가로서 다양한 무대에 서게 된 것은 물론, 자신의 음악에 귀 기울여주는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김기훈은 “많은 분들이 제 음악을 좋아해주는 이유에 대해 혼자 고민한 적이 많다”며 “내 노래를 들으며 (스스로는) 그렇게 좋다고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수많은 무대에 섰지만, 음악가들은 자신의 무대에 높은 점수를 주지 않는다. 김기훈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무대에 설 땐 음악을 인위적으로 만들려고 하지는 않아요. 음악가는 무대에서 누구보다 멋져 보여야 하고, 감동을 선사해야 하지만 그것만을 위해서 노래를 한다면, 본질을 잃어버리는 게 아닐까 싶어요. 보여주기에 치중한 음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김기훈이 노래를 하는 방식도 그렇다. 일부러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편안하게 뱉어낸다. 이른바 ‘웃상 창법’은 관객들의 얼굴에도 미소를 띄게 한다. 그만큼 편안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바리톤 김기훈이 클래식 음악계의 심장인 영국 위그모어홀에서 데뷔, 한국 가곡을 들려주는 리사이틀을 연다. [아트앤아티스트 제공]

그는 “웃으며 노래하기도 하지만, 음악이 풍기는 분위기, 가사 내용이나 제가 전달하고 싶은 내용에 따라 표정이 자연스럽게 나온다”며 “외국에서 오페라 가수로 캐스팅 됐을 때 ‘너는 다른 배우들과 다르다. 일상생활을 하는 것처럼 연기해 보는 맛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며 웃었다.

김기훈은 2023/2024 시즌 영국 코벤트가든에서 ‘라보엠’의 마르첼로,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돈 카를로’의 로드리고, 2024/2025 시즌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에서 ‘라보엠’의 쇼나르 역으로 데뷔를 앞두고 있다. ‘웃는 인상’의 성악가에겐 선하고 유쾌한 역할이 종종 주어진다. 그런 김기훈은 최근 미국 텍사스 댈러스 오페라극장에서 처음으로 악역에 도전했다. ‘토스카’의 스카르피아 역이다.

그는 “스카르피아는 겁탈, 강간, 협박하는 역이다. 어떻게 역할을 소화할 것이냐는 질문에 ‘웃는 사람이 사이코 연기를 하면 더 무섭지 않겠느냐’고 답했다. 관객들 평이나 현지 언론 평가도 좋았다”며 “연기 스펙트럼을 넓혀 다양한 역할을 해내는 팔색조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2021년 BBC 카디프 우승을 비롯해 2019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2등, 오페랄리아 성악 콩쿠르 우승 등 성악가로서 그의 이력은 화려하다. 어느덧 세계 무대가 주목하는 성악가로 자리매김 한 것. 하지만 지금에 이르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전남 곡성 출신인 그는 클래식 음악을 접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꿋꿋하게 음악의 길을 걸었다. ‘미래’를 잊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시간을 보내던 고등학교 시절”, 자신의 가능성을 봐준 사람을 만났다. 교회 성가대 세미나에서 만난 강사였다. 그가 김기훈의 재능을 발견해 준 것이 성악 공부를 시작한 계기였다.

“성악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할 줄은 알았던 것 같아요. ‘열린음악회’나 TV에 나오는 성악가들을 성대모사했는데, 그 땐 그것이 재능인지 몰랐어요. 그 개인기가 저를 먹여 살릴 업이 될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막상 성악을 시작했지만, 쉬운 길은 아니었다. 콩쿠르 우승 타이틀을 따기까지 ‘만년 2등’ 타이틀을 안고 다녔다. BBC 콩쿠르 이후엔 슬럼프도 찾아왔다. 그는 “‘이 정도면 됐지’라는 시건방진 생각을 했을 때 꼭 슬럼프가 온다”며 “뭔가를 이루고 난 뒤 오는 허탈감 때문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어떤 큰 산을 오르고 나면 탄탄대로만 있을 것 같은데, BBC 카디프 이후 한동안 노래가 안 됐어요. 6개월 정도 슬럼프가 이어진 것 같아요. 슬럼프를 이겨내려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고, 다시 시작해보고, 내가 놓친 게 무엇인지 정리해봤어요. 부족함을 극복하고 나니 성장한 저를 볼 수 있었죠. 다음 슬럼프는 또 언제 올지 생각하기도 해요. 그래도 슬럼프가 있을 때마다 성장해왔기 때문에 두렵지는 않아요.”

shee@heraldcorp.com

연재 기사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