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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낯설게 바라본 익숙한 풍경…“일상은 나와 세계의 관계”
갤러리현대 유근택 개인전 ‘반영’
’창문‘, ‘분수’, ‘반영’ 연작 40여점
‘일상’은 동양화가 유근택의 세계를 만드는 중요한 키워드이자 돌파구였다. 매일의 풍경을 관찰하며 달라진 ‘감각의 떨림’, 미묘한 감각의 변화에서 시작된 ‘풍경의 변주’는 고스란히 네모난 화면에 담겼다. [갤러리현대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일상은 세계와 나와의 관계예요. 팬데믹, 아버지의 죽음…. 어떻게 보면 제가 지나온 시간을 반영한다고 볼 수도 있죠.”

창문 너머로 바라보는 서울 성북동의 희미한 불빛, 이사를 앞두고 쌓아 둔 짐에서 만난 기묘한 생동감, 거대한 대지를 뚫고 솟구치는 새순의 생명력….

‘일상’은 동양화가 유근택(58)의 세계를 만드는 중요한 키워드이자 돌파구였다. 매일의 풍경을 관찰하며 달라진 ‘감각의 떨림’과 미묘한 감각의 변화에서 시작된 ‘풍경의 변주’는 고스란히 네모난 화폭에 담겼다. 그 안엔 작가의 이야기가 켜켜이 쌓여있다.

개인전을 앞두고 만난 유근택은 “일상이라는 화두를 꺼낸 것은 대학원에 다닐 때”라며 “당시는 화단 전체가 거대 담론에 몰두해 소진돼 있었다”고 말했다. 1995년 즈음의 이야기다.

관념적 세계에 대한 권태로부터 출구를 찾아 헤맨 작가의 시선이 닿은 곳은 우리가 발 붙인 바로 이 세계였다. ‘매일의 삶’이라는 다분히 ‘일상적인 언어’가 아닌,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깊이 감각하는 ‘일상성’이었다.

놀랍고도 찬란한 세계가 담긴 유근택의 ‘반영’(12월 3일까지, 갤러리현대)은 지난 2017년 ‘어떤 산책’ 이후 갤러리현대에서 6년 만에 열리는 개인전이다.

전시에선 작가의 시선에 담긴 수많은 일상과 풍경의 ‘연작’들이 소개된다. 두꺼운 한지를 여러 겹 배접해 드로잉과 채색을 하고, 물에 흠뻑 적셔 철솔로 한지의 표면을 거칠게 올리며 다시 채색하는 고된 작업을 거친 ‘일상의 기록’이다.

유근택, ‘창문 - 새벽’, 2022, 한지에 수묵채색, 144 x 101 cm [갤러리현대 제공]

층층마다 일상의 표현은 달라진다. ‘창문’, ‘거울’, ‘이사’ 연작이 걸린 1층 전시장은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주변의 풍경이다. ‘창문’은 작가가 1990년대 후반부터 줄곧 탐구해온 대상이다. 성북동 자택 창문 너머로 본 새벽 풍경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고스란히 옮긴다. 작가의 세계와 내면의 변화는 창밖 풍경을 다채롭게 채색한다.

“2022년 8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례식장에 있다가 새벽에 잠깐 집에 온 적이 있어요. 창문을 열었는데, 어떤 불빛이 강렬하게 와닿더라고요. 그걸 드로잉으로 남겨놓은 것이 있어요. 이번 전시에선 볼 수 없지만, 저의 삶은 그렇게 순간순간 달라진다는 걸 느끼게 되는 작업이었어요.”

‘이사’ 연작에선 꿋꿋이 지켜온 자리에선 미처 몰랐던 사물의 생명력을 체감한다. 짐을 쌓고 포장하는 과정에서 낯설게 다가온 사물의 표정을 담은 작업이다. 유 작가는 “동물적이고 기묘한 것들로 풍경화가 만들어진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2층으로 걸음을 옮기면, 작가의 시선은 문 밖으로 향한다. 구체적이었던 일상(‘창문’, ‘이사’)은 이곳에선 초현실적으로 모습을 바꾼다. “조금 더 폭력적인 요소를 끌어안은 작업”이라는 게 작가의 설명이다.

유근택 [갤러리현대 제공]

메마른 땅을 뚫고 나오는 새순에서 본 거대한 에너지의 경이로움은 연작의 동기가 됐다. 땅에 대한 관찰에서 시작된 작업이 바로 ‘봄-세상의 시작’이다. 유 작가는 “모든 사물이 다 죽어있는 것 같은데, 그 와중에 딱딱하고 차가운 땅을 뚫고 올라오는 봄날의 새싹은 굉장한 놀라움을 준다”며 “어떤 때는 그것이 괴물같기도 하다”고 말했다. 때려도 때려도 계속 올라오는 ‘두더지 게임’처럼 끊임없이 돋아나는 기운찬 생명력을 담아냈다.

전시 제목이기도 한 ‘반영’ 연작은 서울 상암동 월드컵공원의 숲 풍경과 물가에 반사된 풍경을 그렸다. 화면의 상단엔 바람에 흩날리는 숲의 풍경을 그렸고, 하단엔 물가에 반영된 숲의 추상적 세계를 담았다. 나무가 뿌리를 내리듯 뻗어나가는 모습을 통해 인간의 내면과 외면을 동시에 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지하 전시장으로 향하면 작가의 대표 연작, ‘분수’ 시리즈 15점을 만날 수 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분수를 그려왔지만, 지금은 완전히 다른 세계로 확장을 꾀했다. 지난 2020년 전 세계를 점령한 감염병과 2022년 아버지의 죽음이 그의 세계를 완전히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익숙한 풍경을 생경한 방식으로 바라보는 그의 시각이 새롭다.

유 작가는 “팬데믹 당시 요양병원에 있던 아버지와 면회도 어렵고 전화도 걸 수 없는 상황에서 간병인에게 매일 그림 사진을 보내며 아버지에게 보여달라고 했다”면서 “10개월 간 그런 과정을 통해 분수에 대한 생각이 변해갔다”고 돌아봤다.

분수 그림은 애초 ‘풍경’의 요소에서 시작됐으나, 작가의 실험을 통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확장하고 진화했다.

“물방울이 물방울을 밀어 올려 서있는 형태가 분수의 존재 형식인데, 물줄기가 올라와서 쓰러지는 순간이 비극적이면서도 찬란하다는 역설적인 생각을 하게 됐어요. 어떻게 보면, 인간이 서있는 방식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유근택, ‘분수’, 2023, 한지에 수묵채색, 258 x 206 cm [갤러리현대 제공]

그는 비극적이라는 ‘분수의 본질’이 일상을 환기하는 장치라고 봤다. 풍경의 요소로 선을 긋는 행위에서 시작한 작업은 물방울 하나 하나의 존재에 대한 ‘집착’으로 나아갔다.

유 작가는 “분수를 바라보면서 모든 생각이 사라지며 그저 그림만을 감상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되기를 바라는 욕심을 담아 이 공간을 구성했다”고 말했다.

유근택의 세계는 음악적 언어로도 다시 태어난다. 갤러리현대는 이번 전시를 음악으로 풀어낸 앨범 ‘유근택: 반영’을 다음 달 8일 전시와 함께 발매한다. 재즈 기반 뮤지션이자 베이시스트인 정수민이 전시의 주요 연작을 곡 제목으로 작업한 재즈 기반의 앨범이다.

갤러리현대는 “미술과 음악이라는 각기 다른 영역의 예술에서 활동 중인 유근택과 정수민은 ‘일상’을 주목하고, 이를 기존의 전통적인 언어가 아닌 자신만의 언어로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한다는 점에서 닮았다”며 “유근택 작가가 일상의 풍경을 철솔질을 통해 화면의 물성과 공간감을 일으키는 점은 활이나 손으로 콘트라베이스를 뜯어내듯 연주하여 특유의 질감과 공간감을 형성하는 정수민의 음악 세계와 유사하다”고 설명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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