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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을 오케스트라 대전 본격화...정작 돈 버는 공연은 없다?
팬데믹에 취소·연기됐던 공연 ‘쏠림’
한국 클래식시장 고정관객 3000명 추산
고가 티켓경쟁 불구 공연 흥행 힘들어
스타파워 없이는 ‘대패’ 출혈경쟁 심각

“2주간 서울에서 지내면서 굉장히 놀라웠다. 이 조그만 나라에서 전 세계 명문 오케스트라 라인업이 총출동하고, 이렇게 높은 수준의 음악을 자주, 다양하게 향유한다는 것이 무척 놀랍다.”

최근 예술의전당에서 만난 로베르토 아바도 볼로냐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는 국내 클래식 공연의 출연진 라인업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베를린 필하모닉, 빈 필하모닉을 비롯한 굴지의 악단이 줄줄이 공연을 앞두고 있다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탈리아의 오페라하우스 작업을 주로 하는 예술감독 친구가 한국에 온 적이 한 번도 없다 길래, 이런 이야기를 해주며 꼭 한국에 와봐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귀띔했다. 그는 개막을 앞둔 영국로열오페라하우스 프로덕션의 오페라 ‘노르마’(10월 26일 개막)의 지휘를 맡아 한국에 머물고 있다.

놀란 것은 한국을 찾는 ‘세계적인 거장’들만이 아니다. 국내 클래식 관계자들도 마찬가지다. 이들 역시 “지난 10~20년 동안에도 이 정도의 초호화 악단 라인업은 본 적이 없다”고 말할 정도다. 많아야 2~3개 악단의 내한이 몰렸던 과거 10~11월 성수기 상황과도 완전히 다르다.

▶두달 간 10개 악단 러쉬...R석 가격 55만원까지 급등=올 가을 대한민국에선 본격적인 ‘오케스트라 대전’이 시작된다.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굵직한 유럽 주요 악단들을 필두로 총 10개 오케스트라가 두 달간 한국을 찾는다. 코로나19로 미뤄졌던 공연들이 지난해 여름 방역조치 완화 이후 밀려들면서 누구도 의도치 않은 ‘역대급 대전’이 이뤄진 것이다. 한 관계자는 “팬데믹으로 재정 악화에 시달린 오케스트라들이 아시아 투어로 숨 쉴 구멍을 마련하고자 하는 의중도 있었다”고 봤다.

그 결과 국내 공연업계 오케스트라 라인업이 놀랄 정도로 화려해졌다. 지난 7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관람해 예술의전당을 떠들썩하게 했던 런던 필하모닉을 시작으로 파보 예르비가 이끄는 취리히 톤할레가 지난 13일 공연을 마쳤다.

오는 24일부턴 체코 필하모닉을 시작으로 홍콩필과 양인모(10월 28일·예술의전당), ‘클래식계의 아이돌’ 클라우스 메켈레가 이끄는 오슬로 필하모닉(10월 30일·롯데콘서트홀), 빈 필하모닉과 랑랑(11월 6일 롯데콘서트홀, 11월 7~8일 예술의전당), 베를린필하모닉과 조성진(11월 11~12일·예술의전당), 로열콘세르트헤바우(11월 11일·롯데콘서트홀),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와 조성진(11월 15~16일·예술의전당) 정명훈이 이끄는 뮌헨 필하모닉과 임윤찬, 클라라 주미강(11월 26, 30일 예술의전당, 11월 29일 세종문화회관, 12월 1일 롯데콘서트홀)의 공연이 이어진다.

사상 초유의 ‘내한 러시’는 ‘출혈 경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유럽 유수 악단들인 만큼 티켓 가격이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경쟁이 어느 때보다 치열하기 때문이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공연은 최고 등급 좌석인 R석 기준 역대 최고가인 55만원이었으며 빈필은 48만원, RCO는 45만원, 뮌헨필은 36만원에 달한다. 최고 등급 좌석으로 최저가는 홍콩필(12만원)이다.

티켓 가격을 결정하는 요소는 복잡다단하다. 기본적으로 해외 오케스트라의 ‘네임 밸류’, 개런티, 항공료, 국내 체류비와 교통비가 포함되나 이외에 다양한 요소들이 고려된다. 기업 협찬과 후원사의 숫자, 지방 공연장의 공연권 구매가 티켓 가격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업계에선 “결국 티켓 가격을 매기는 것은 기획사의 선택”이라고 입을 모은다.

문제는 관객들의 ‘지갑 사정’이다. 수 십만원 대에 달하는 클래식 공연을 모두 소화하기엔 한국 클래식 시장은 너무 좁다. 1000만 도시 서울에서 조차 클래식 관객은 7만 명에 불과하다는 게 업계의 정설이다. 그 7만 명 마저도 직접 공연장으로 찾아오는 ‘적극적인 관객’은 아니다. 한 클래식 기획사 관계자는 “한국 클래식 시장의 고정 관객수는 국내 최고 악단을 찾는 관객수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 보통 국내 최고 악단의 관객수는 약 3000명 수준이다.

▶명성·스타파워 없으면 ‘대패’...최종 승자는 홍콩필= ‘대전’의 과정은 뼈아프다. 티켓 예매를 일찌감치 시작했으나, 유서 깊은 유럽 악단들이 ‘이름 경쟁’에 치여 선택받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그래도 예외는 있다. 세계 톱2 악단인 베를린필과 빈필의 상황이다. 한국의 ‘클래식 스타’로 강력한 티켓 파워를 갖춘 피아니스트 조성진이나 임윤찬의 공연 역시 ‘티켓 걱정’이 없는 공연이다. 누구나 다 아는 아티스트의 명성에 기댄 공연 향유는 ‘명품 소비’ 성향과 닮았기 때문이다. 한 공연기획사 관계자는 “베를린필이나 빈필은 소위 말하는 ‘어나더 레벨’”이라며 “일 년에 한 번쯤 나를 위한 문화 활동이자 보복소비 차원으로 클래식 애호가가 아닌 대중까지 끌어들이는 공연”이라고 말했다.

난감한 상황에 놓인 것은 스타 협연자는 없지만,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명문 악단들이다. 음악성과 음색으로는 ‘네임 밸류’를 뛰어넘지만, 고가의 티켓 경쟁에서 밀린 악단들이 예상 외로 많다. 파보 예르비가 이끌고,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가 협연자로 나섰던 명문 악단 취리히 톤할레는 기존 예르비의 내한공연과 달리 빈자리가 간간이 눈에 띄었다.

같은 공연장에서도 좌석마다 티켓이 팔리는 속도가 다르다. 대형 오케스트라의 경우 연주자들의 숨소리까지 들리는 가장 비싼 좌석과 가장 저렴한 좌석이 먼저 판매된다. 일부는 오케스트라의 풍성한 소리를 온전히 들을 수 있는, 무대와 먼 좌석을 선호하기도 한다. 저렴한 A석은 가성비 좋은 자리로 꼽힌다. R석은 일반 관객은 물론 기업의 마케팅용으로 많이 판매된다.

오히려 ‘애물단지’로 여겨지는 것은 S석이다. 만족도가 높은 R석도, 가성비가 좋은 A석도 아닌 애매한 가격 때문이다. 한 관계자는 “가격 메리트가 없고, VIP 증정시에도 최고 등급이 아니라 늘 S석이 처치 곤란이다”라고 귀띔했다.

이번 ‘오케스트라 대전’의 승자는 홍콩필과 양인모의 공연이다. 당초 2020년 3월 예정됐던 이 공연은 팬데믹으로 줄곧 미뤄지다 올 10월 대전에 합류했다. 공연은 티켓 오픈과 동시에 매진 사례를 기록했고, 현재까지도 추가 티켓 구매 문의가 이어질 정도다.

이같은 성과는 기획사의 영리하고 대담한 전략이 있어 가능했다. 프레스토 아트 관계자는 “대형 악단과 비슷한 티켓 가격으로는 경쟁력이 떨어진다 생각해 모험을 감행해 티켓 가격을 대폭 낮췄고,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를 전면에 내세워 공연명도 ‘양인모 & 홍콩필하모닉오케스트라’로 삼는 전략을 세웠다”고 말했다. 실제로 클래식 애호가들 사이에서 이 공연은 ‘은혜로운 가격’으로 일찌감치 입소문이 났다.

홍콩경제무역대표부가 홍콩필의 메인 스폰서로 든든히 자리해, 티켓 가격을 더 낮출 수 있는 유인이 되기도 했다. 특히나 협연자로 지난해 시벨리우스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한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를 선택한 것은 ‘신의 한수’였다. 연주곡 역시 그에게 콩쿠르 우승을 안겨준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이다. 기획사 관계자는 “이번 공연을 통해 양인모의 엄청난 ‘티켓 파워’를 확인했다”고 귀띔했다.

▶공연 많아져도...“돈 버는 무대는 없다?!”=클래식 공연계의 이같은 다양하고 풍성한 ‘성찬’에도 뒷맛은 여전히 개운하진 않다. ‘문화 대사’를 자처하는 베를린필, 빈필과 한국 최고의 ‘클래식 스타’들의 공연을 제외하면 이번 대전엔 ‘상처’만 남게 될 공연자들이 많을 것이란 우려 때문이다.

심지어 최정상 연주자들의 공연에서도 수익이 남지 않을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티켓 가격이 아무리 비싸도, 톱티어 오케스트라를 모셔와도 돈 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며 “이젠 공연만 잘 마치자는 데에 의의를 두고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공연을 여는 기획사와 공연장은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살 길’을 찾는다. 익명을 요청한 한 관계자는 “특정 기획사에선 여러 공연을 유치해 일부에서 흥행에 실패해도 다른 공연이나 지방 판매로 손해를 메울 수 있는 구조를 만들기도 하고, 끼워팔기가 이어지기도 한다”고 귀띔했다.

올 한해 클래식계의 ‘출혈 경쟁’을 지나면 향후 클래식 공연을 향유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한 기획사 관계자는 “가격 부담으로 관객들이 선택과 집중을 해야하는 상황에서 저조한 판매 실적으로 향후 해외 악단 초청에 소극적이 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고승희 기자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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