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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장 ‘힙’한 ‘라 트라비아타’…오페라는 과거의 유물 아냐” [인터뷰]
연출가 뱅상 부사르·소프라노 박소영
국립오페라단, 21~23일까지 공연
베르디 의도 반영·동시대 감각 재탄생
국립오페라단의 신작 ‘라 트라비아타’의 연출을 맡은 뱅상 부사르(왼쪽)와 소프라노 박소영은 “기존에 익히 봐온 ‘라 트라비아타’와는 완전히 다른 작품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임세준 기자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피아노 한 대가 놓여 있는 평범한 음악 연습실. 어디에서나 볼 법한 이 곳에 가죽 재킷에 청바지를 입은 비올레타가 나와 노래 연습을 시작한다. 170여년 전 고전이 현재로 들어온 모습. 비올레타는 마치 소프라노 박소영의 ‘오늘’인 것처럼 무대에 등장한다. 주세페 베르디(1813~1901)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첫 장면이다.

“캐스팅이 된 이후, 전통적인 ‘라 트라비아타’를 섭렵하며 깊이 연구했어요. 그런데 첫 연습에 가자마자 제 생각이 완전히 뒤집어졌어요. 비올레타를 과거의 오페라에 갇힌 인물이 아니라 (지금의) 박소영을 통해 살아난 인물로 보여줘야 한다지 뭐예요.” (박소영)

연출 의도는 분명했다. 국립오페라단 ‘라 트라비아타’(9월 21~23일)의 개막을 앞두고 최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만난 뱅상 부사르 연출가는 “관객에게 오페라 속 비올레타가 아닌 소프라노의 일상적인 모습을 한 인물이 점차 비극적 결말을 맞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소프라노 박소영의 임무가 막중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베를린 코미쉐 오퍼 등에서 ‘마술피리’ 밤의 여왕을 통해 화려한 음악성과 연기력을 알렸던 그에게 이번 ‘라 트라비아타’는 색다른 도전이었다. 박소영은 “기존에 익히 봐온 ‘라 트라비아타’와는 완전히 다른 작품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뱅상 부사르(왼쪽) 연출가와 만나 동시대를 입은 베르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1853년 초연)의 비올레타 역할을 통해 소프라노 박소영(오른쪽)은 새로운 모습에 도전한다. 임세준 기자
동시대성 입은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프랑스 출신의 뱅상 부사르 연출가는 베르디 오페라에 ‘현재’를 입혔다. 베르디의 기획 의도와도 맞아 떨어진다. ‘라 트라비아타’(1853년 초연)는 베르디가 처음으로 동시대성을 안고 쓴 작품이다.

“베르디는 그 시대 관객들이 입는 의상과 습관을 무대에서 보여주고자 했어요. 하지만 당시는 현재 사회의 모습을 보여줘선 안된다는 검열이 있어, 공연 전 시대 배경을 1세기 전인 18세기로 바꿔야 했죠. 당대의 모습을 인물과 배경을 통해 보여주진 못했지만, 대신 왈츠 등 19세기 음악은 그대로 활용했어요.”

동시대를 보여주고자 했던 베르디 작품의 본질을 살리기 위해 ‘라 트라비아타’는 2023년의 오늘과 만났다. 부사르 연출가는 “1850년대는 전통에 반하는 생각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순종을 강요하는 가부장적 사회”라며 “지금도 여전히 (그런 모습이) 남아있어 가부장적인 문제에 투쟁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으로 현대적인 의상과 연출로 첫 장면을 시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오페라가 현재의 관객과 호흡하기 위해선 여주인공 비올레타에 대한 재해석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비올레타는 ‘사교계 여성’인 코르티잔(부유층을 상대하는 고급 매춘부)으로 나온다. 비올레타와 젊은 귀족 알프레도와의 사랑이 작품의 큰 줄기다. 신분이 다른 두 사람의 사랑엔 장애가 많다. 비올레타를 옥죄어 오는 폐병, 알프레도의 아버지 제르몽의 경멸, 사회적 관습과 속물주의…. 익히 봐온 구조와 스토리다.

베르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여주인공 비올레타의 의상 디자인 [국립오페라단 제공]

부사르 연출이 그린 비올레타는 한 명의 예술가였다. 1847년 파리에서 사망한 실존 인물, 마리 뒤플레시가 프란츠 리스트에게 피아노를 선물 받은 일화는 첫 장면의 무대와 소프라노 박소영의 모습을 한 ‘현재’로 보여준다.

박소영은 “비올레타는 단순히 돈을 받고 하룻밤을 보내는 여자가 아니라 주체적이고 똑똑한 여성”이라며 “‘캐릭터가 사실적이다 보니 비올레타의 심리에 다가서는 데에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고 말했다.

부사르는 앞서 국립오페라단의 ‘마농’, ‘호프만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수백년 전 작품을 동시대 관객과 호흡할 수 있게 연출한 바 있다. 과거의 작품과 현재의 접점을 만들고, ‘오늘의 시선’으로 재창조하는 것은 그의 연출관이다.

그는 “과거의 오페라와 현대 관객들이 만나는 징검다리가 되는 게 나의 궁극적 목표이자, 일종의 강박관념”이라며 “시간의 격차로 인한 장막을 없애 오페라가 박물관에 박제된 과거의 유물이 아닌 현대적인 얼굴을 한 작품이 되도록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는 소프라노의 커리어에서 중요한 배역으로 꼽힌다. 박소영은 이 배역을 ‘꿈의 역할’이라고 했다. “작곡한 음악은 절대로 손대지 않고 원형을 유지해 들려준다”는 것이 부사르 연출가의 철칙이다. 임세준 기자
현대적 연출에 정통성 살린 음악…소프라노 커리어의 필수작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는 소프라노의 커리어에서 중요한 배역으로 꼽힌다. 벨칸토 창법으로 성악 기술의 정수를 보여주면서 비극을 향해 치닫는 여류 예술가의 모습을 그려내고, 여기에 남성이 지배하는 폭력적 시대에 저항하는 고통까지 음악에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국립오페라단의 ‘라 트라비아타’는 이야기와 무대엔 ‘현재의 감각’이 더해졌지만, 음악은 베르디 시대의 ‘정통성’을 고스란히 살렸다. “작곡한 음악은 절대로 손대지 않고 원형을 유지한다”는 것이 부사르 연출가의 철칙이다. 다른 작품에선 생략되기 일쑤였던 비올레타의 아리아 ‘이상해!’의 2절도 원작 그대로 연주한다.

박소영에게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는 ‘꿈의 역할’이었다. 그는 “대학 다닐 때 처음으로 했던 콘서트 오페라 작품이기도 하고, 여러 차례 콘서트와 갈라 무대를 통해 곡의 70% 이상을 소화했지만 전막 오페라에 주연으로 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무대 위 박소영은 2시간 30분 내내 쉴 틈이 없다. 연기와 더해진 음악은 ‘초고난도’다.

“고음도 고음이지만, 이 고음을 기술적으로 표현하면서 그 안에 고통과 기쁨 등 비올레타의 감정 연기가 노래로 담겨야 해요. 그래서 무척 어려운 작품이죠.” (박소영)

연극을 전공한 이후 세계적인 오페라 연출가가 된 부사르는 성악가들에게 노래뿐 아니라 연기도 강조한다. 그는 “관객와 무대 사이의 다리를 만들어주는 것이 연출이라고 생각한다”며 “아름다운 오페라 작품에 좋은 조건이 마련되면 감정이 더 잘 전달돼 관객들이 이야기 속으로 쉽게 빨려 들어가게 된다”고 말했다. 그 ‘조건’은 배우들의 연기와 노래, 이들의 손짓과 몸짓 같은 움직임 등 모든 것이 해당한다.

소프라노 박소영은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를 맡았다. 임세준 기자

“그런 점에서 박소영은 많은 장점을 가진 완벽한 성악가에요. 인물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은 물론 우아한 언어를 갖고 있어 비올레타의 심리를 섬세하고 아름답게 그리죠.” (뱅상 부사르)

이 작품에서의 비올레타는 1, 2, 3막 모두 다른 모습으로 그려진다. 부사르 연출가는 “비올레타는 1인 3역이라 봐도 무방하다”며 “박소영의 세 가지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소영과 함께 소프라노 윤상아가 비올레타 역을 맡았고, 순수한 사랑을 고백하는 알프레도는 김효종과 김경호가 연기한다.

“‘라 트라비아타’를 통해 성악가들의 살아있는 감정과 감성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 감성은 굉장히 진지하면서 아름답고, 보편적이에요.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뱅상 부사르 연출가)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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