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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술관 묶고 싶은’ 김구림·‘샤워캡 쓰고 희망 노래’ 성능경…한국의 ‘실험미술’을 엿보다
韓 실험미술 선구자들의 예술세계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 ‘김구림전’
갤러리현대, ‘성능경의 망친 예술 행각’
성능경 작가가 서울 삼청동 갤러리현대에서 열리고 있는 자신의 회고전에서 핑크빛 샤워캡과 설글래스를 쓴 뒤 작품 하나 하나에 이름을 붙였다. 고승희 기자

#1. “누가 이런 걸 예술이라 하겠어요”

지난 22일 서울 삼청동 갤러리현대. 하얀 러닝에 중절모, 청바지를 입은 성능경 작가가 ‘매일의 루틴’을 보여준다. 작가가 매일 아침 일어나면 하는 ‘하루 운동’을 시작한다. 걸그룹 뉴진스의 ‘슈퍼 샤이’ 안무와 비슷한 상체 동작으로 시작해 런지, 버핏으로 나아간다. 고교 시절 은사에게 배운 이 동작은 작가의 ‘평생 작업하며 살 수 있는 묘약’이라 했다. 숨을 헐떡이며 준비 동작을 마친 뒤엔 본격적인 ‘제목 짓기’가 이어진다. 1980년대 작가의 대표 연작인 ‘현장’. 그는 핑크빛 샤워캡과 선글래스를 쓴 뒤 작품 하나 하나에 이름을 붙였다.

#2. “아방가르드 작가라고 하는데, 미안하지만 이번 전시에 아방가르드한 작품은 하나도 없고 고리타분한 것들만 늘어놨어요.”

심장박동기를 달고, 휠체어에 몸을 의지했지만, 아직 작가로서의 기개만큼은 카랑카랑했다. 지난 24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회고전에 나타난 김구림 작가 얘기다. 1950년대 후반 평면 추상부터 2023년 최신작까지 작가의 광범위한 예술 행보를 돌아보는 회고전에서 그의 발언은 거침이 없었다. 그는 “파격적인 작품을 보여주지 못해 죄송하다. 작가라고 얼굴을 내밀 수가 없다”며 눈을 질끈 감았다. 국립현대미술관을 광목으로 묶는 작업이 무산된 데에 대한 작가의 아쉬움의 표현이었다.

김구림(87)은 저항했고, 성능경(79)은 재기발랄했다. 세상은 달라져도 1세대 ‘실험미술 거장’들은 여전했다. 시대와 경계를 뛰어넘어 탈장르, 탈예술의 독자적 작품 세계를 만들어 온 원로 작가들의 n번째 전성기가 다시 왔다.

다음 달 1일 미국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개막하는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전에 작품을 내놓는 김구림·성능경 작가의 작품 세계를 한국에서 미리 만난다. 키아프-프리즈를 앞두고 열리는 전시인 만큼 관람객들의 관심도 커질 것으로 보인다.

김구림 작가가 24일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김구림 '전 기자간담회에서 작품 '음과 양 91-L 13'을 설명하고 있다. [연합]
규정된 모든 것을 거부한다…경계 없는 김구림의 세계

네모난 테이블 위에 얹은 새하얀 식탁보. 그 위로 걸레가 올라가 식탁보에 물을 들인다. 한쪽엔 유리잔이 자국을 남긴 채 우두커니 놓여있다. 1974년작 ‘걸레’. 일본에 머물며 판화에 대한 이해를 넓힌 김구림 작가가 ‘제9회 도쿄국제판화비엔날레’에 출품한 작품이다. 작품은 백화점에서 구매한 식탁보 위에 걸레와 물의 흔적을 실크스크린으로 찍어 완성했다. 판화는 ‘평면적’이라는 고정관념을 깬 예술이다. 당시 그의 작품은 비엔날레에서 상업적인 영역과 예술의 영역을 넘나든 작업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하지만 제3회 동아국제판화비엔날레에선 판화로 인정받지 못해 출품을 거절당했다.

김구림의 작품 세계는 경계가 없다. 세계가 정해둔 틀을 부수고, 선을 밟으며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했다. 미술을 비롯해 영화, 음악, 무용, 연극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한 ‘총체 예술가’ 김구림의 회고전 ‘김구림’ 전이 국립현대미술관(2024년 2월 12일까지)에서 열린다. 비디오아트, 설치, 판화, 퍼포먼스, 회화 등 230여점을 만날 수 있는 자리다.

김구림 작가의 1974년 작 ‘걸레’. [연합]

전시엔 작가의 시대정신을 볼 수 있는 작품이 많다. 1950년말∼1960년대초 한국 미술계에 앵포르멜(비정형) 미술이 주류를 이루던 시대에 붓을 사용하지 않고, 퍼포먼스와 같은 행위로 비정형의 화면을 만들었다. 패널 위에 비닐을 바르고 불을 붙여 석유가 묻은 부분이 불에 타면 담요 등으로 불을 끄고 남은 흔적을 골조로 삼았다. 그는 이같은 작업은 “회화가 아닌 회화, 즉 그리지 않은 회화”라 명명했다. ‘핵1-62’(1962), ‘질-62’(1962)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핵 1-62’는 작가가 경험한 전쟁의 참상과 충격, 청춘기의 불안정성에 대한 회고다.

또 한국 최초의 ‘일렉트릭 아트’로 불리는 ‘전자예술 A’(1969)를 비롯해 얼음이 녹는 과정을 작품으로 활용한 ‘현상에서 흔적으로’(1970), 실험영화 ‘1/24초의 의미’(1969), 1990년대부터 이어진 ‘음과 양’ 시리즈 등 전시는 ‘선구자의 길’을 걸어온 작가의 작품을 망라한다.

김구림, ‘1/24초의 의미’, 1969,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우현정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1950년대부터 이어진 김구림의 전방위적 활동과 거침없는 도전은 관습에 대한 저항이었다”면서 “이번 전시는 그간 이론적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었던 작가의 작품 세계를 최대한 온전하게 전달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다만 작가는 이번 전시가 성에 차지 않는다. 1970년대 미술관 건물 일부를 광목천으로 묶었던 ‘현상에서 흔적으로’ 작품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재현하려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은 탓이다. 미술관이 등록문화재 제375호로 지정돼있어 관련 부처와 협의가 필요했고, 결국 시간적인 한계로 무산됐다.

미대를 다니다 “배울게 없어 중퇴”했고, “캔버스에 사물을 그린다는 것이 의미가 없어” 방향을 전환했다고 말하는 김 작가는 일생동안 전근대적 사고와 제도를 뒤흔들었다. 미술관을 묶는 작업 역시 제도를 비판하며, 새로운 미술을 하기 위한 접근이었다. 그는 “미술관이 왜 필요하겠냐”며 “미술관이 행정에 얽매여 예술을 펼치지 못하게 했다. 이는 현대미술을 말살하는 처사”라고 꼬집었다.

한국의 실험미술은 이제 구겐하임으로 향한다. 수십 년 전의 작품이지만 김구림의 미적 태도는 지금도 여전히 젊고 파격적이다.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의 눈엔 한국을 넘어 미국도 좁다. 그는 “구겐하임이라고 대단하지도 않다”며 “이름만 구겐하임이지 아주 고리타분하고 진취성은 없다”고 말했다. 조용했던 미술관에 웃음이 번졌다.

성능경 작가 [갤러리현대 제공]
‘망친 작품이 더 아름답다’…성능경 작가에게 예술이란

“예술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늘 미궁에 빠져요. 대답할 수 없지만, 질문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들이 있어요. 그게 바로 예술이란 무엇이냐는 거예요.“

1990년대 컬러 사진 시대가 도래하며 성능경 작가의 사진에도 ‘총천연색’이 입혀졌다. 1991년 대구 삼덕 갤러리에서 열렸던 개인전에서 처음 발표한 ‘S씨의 자손들-망친 사진이 더 아름답다’. 이 작품은 ‘S씨의 반평생’(1977)의 후속작 격이다.

갤러리현대의 2층 벽면을 가득 채운 이 사진엔 초등학교 교사 아내 대신 독박 육아로 키운 네 남매의 성장과정이 오롯이 담겼다. 다만 사진의 초점은 안 맞고, 피사체는 프레임 밖으로 나가기 일쑤다. 작가는 망쳐버린 사진을 아이들이 먹다 남긴 사탕과 과자 포장지와 병치했다. 그러자 그 자체로 예술이 됐다. 1990년대 작가의 예술 세계를 관통하는 주제인 ‘망친 예술’이 태어난 순간이다.

‘성능경의 망친 예술행각’(10월 8일까지, 갤러리현대)은 1970년대부터 작가의 시대별 대표작 140여 점을 엄선한 미니 회고전이다. ‘한국적 개념미술’을 개척한 성능경은 “이번이 나의 세 번째 상업 전시”라며 “그동안 나의 작업 세계를 전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전시를 원했다”고 말했다.

‘성능경의 망친 예술행각’ [갤러리현대 제공]

전시에선 신문 보도사진을 작업의 매체로 활용한 성 작가의 대표 연작 ‘현장’도 만날 수 있다. 신문은 언제나 그의 작업 세계에서 중요한 매체였다.

1979년 처음 선보인 ‘현장’을 완성하기 위해 그는 수년에 걸쳐 모든 종류의 신문 보도사진을 채집하고, 그 중 1500여장을 선별해 마이크로 렌즈로 접사 촬영했다. 성 작가는 “신문 편집자가 제시하는 사진의 해석을 무효화하고 재해석하는 행위”라며 “재편집을 통해 정치적인 사회성이나 편집자 권력의 의도를 재해석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태어난 사진에 점선 등을 그려넣어 작가의 의도를 새기고, 그것에 맞춰 이름을 붙인다. “작명을 했을 때와 하지 않았을 때 개념도 달라진다”는 것이 작가의 설명이다. 그가 ‘개념사진’의 선구자로 불리는 이유다.

성능경, 신문 읽기, 2023 [갤러리현대 제공]

지난 1976년 매일 신문을 읽은 뒤, 읽은 부분을 오려낸 그의 ‘신문 읽기’ 퍼포먼스는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내달 6일에도 이 작업을 외국인 100명과 함께 선보인다. 1970년대 유신정권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시작한 ‘신문읽기’ 작업은 ‘코스모폴리탄’ 시대에도 유효하다.

‘수축과 팽창’(1976), ‘검지’(1976)는 신체 행위를 기록한 사진과 퍼포먼스를 결합한 작품이다.조수진 미술사학자는 “기성 미술이 신봉해 온 고상하고 영웅적인 미술가 관념에 도전하는, 한국 전위의 새로운 유형의 초상 사진”이라고 소개했다.

성 작가의 예술세계는 작업으로 시작해 퍼포먼스로 끝을 맺는다. 퍼포먼스의 마지막은 언제나 현제명의 ‘희망의 나라로’가 장식한다. “자유 평등 평화 행복 가득찬 곳, 희망의 나라로”를 부르는 작가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성 작가는 “희망은 우리 삶의 동력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삶에서 언젠가는 예술가로 입지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전제로 여기까지 오게 됐다”고 말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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