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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장 박동기 찬 신구의 지적이고 치열한 대화 ‘라스트세션’ [고승희의 리와인드]
다른 시대 산 프로이트 vs 루이스의 논쟁
신의 존재부터 양심·고통 등 철학적 주제
무대 단조로워도 배우들 열연에 ‘갈채’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C.S. 루이스의 지적 토론을 담은 연극 ‘라스트 세션’. 배우 신구는 초연부터 프로이트를 연기하며 관객과 만나고 있다. 루이스 역은 이상윤·카이가 맡았다. [파크컴퍼니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1939년 9월 3일, 영국이 독일과 전면전을 선포하며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다. 시시각각 런던 상공으로 비행기가 날아다니고, 쉴 새 없이 공습 경보가 울려대던 그날, 여든셋의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마흔 한 살의 C.S. 루이스가 만난다.

‘신은 존재할까’. 무대는 현실에선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두 사람을 소환하는 ‘기발한 상상’을 토대로 첨예한 논쟁을 이어간다. 죽음의 그림자가 엄습하는 전쟁의 한복판에서 풀어놓는 치열한 지적 대화와 유머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기”(극중 프로이트 대사) 때문이다.

연극 ‘라스트 세션’(대학로 TOM 2관)은 아맨드 니콜라이 교수가 미국 하버드에서 강의한 ‘루이스 VS 프로이트(THE QUESTION OF GOD)’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작품의 토대가 된 ‘루이스 VS 프로이트’는 신의 존재와 사랑, 성(性), 인간, 죽음, 나이듦, 종교와 철학을 주제로 이 둘의 세계관을 이야기한다. 하버드 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강좌로, 이 책은 해당 강의를 엮었다.

‘라스트 세션’은 근사한 작품이다. ‘정신분석학의 선구자’인 무신론자 프로이트(신구·남명렬 분)와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인 유신론자 C.S.루이스(이상윤·카이 분)가 유연하게 치고 받는 ‘말의 향연’이 90분을 가득 메운다. ‘신의 존재’에서 시작된 대화는 도덕률(양심), 고통, 성욕, 자살로 확장한다.

무대는 막이 오르자마자 관객의 손목을 휙 낚아채 단숨에 논쟁의 한복판으로 잡아끈다. 주제는 시작부터 드러난다. 이 둘이 왜 만났는지, 만나서 왜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지 굳이 고민할 필요도 없다. 만남이 성사된 것은 프로이트가 루이스를 초대해서다.

루이스는 자신의 책에서 프로이트의 이론을 비판해 만남이 성사됐다고 생각했지만, 프로이트는 ‘신의 존재’에 대한 루이스의 변증이 궁금해 그에게 만남을 청했다. 유대인으로 평생을 차별 받았고, 오랜 구강암 투병에 전쟁까지 목도한 프로이트의 현실엔 신을 받아들이기 힘든 요소들이 가득 차있다. 그런 프로이트에게 무신론자였다가 유신론자가 된 루이스는 흥미로운 대화 상대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C.S. 루이스의 지적 토론을 담은 연극 ‘라스트 세션’. 배우 신구는 초연부터 프로이트를 연기하며 관객과 만나고 있다. 루이스 역은 이상윤·카이가 맡았다. [파크컴퍼니 제공]

거대한 담론을 쌓아가는 두 사람의 대사는 양도 많고, 이해도 쉽지 않다. 현학적인 수사로 치장하진 않았지만, 뱉어내는 순간 곱씹어야 하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두 학자의 수준 높은 지적 대화는 진정한 토론의 모습을 보여준다. ‘신을 믿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것이야말로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라고 말하는 루이스에게 프로이트는 “유니콘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면 유니콘이 반드시 존재하는 것이냐”며 반박한다. 답변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루이스는 다시 “신이 존재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은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 만큼이나 신의 존재에 대한 강력한 증거”라며 “무언가를 부정하기 위해선 먼저 그걸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답변은 또 다른 질문을 낳는다. 프로이트는 “신이 존재한다면 지금 이 전쟁은 어떻게 설명할 거냐”며 “모든 것에 신의 뜻과 이유가 있다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고통의 뜻은 무엇이냐”며 반문한다. “고통의 주제는 어렵다”면서도 루이스는 “우리는 평온한 길에선 신을 찾지 않는다. 철로 위에서 차가 멈춰 서고, 기차가 날 향해 달려오는 걸 볼 때에야 비로소 신을 찾는다. 신은 고통을 통해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려고 하는게 아니겠냐”고 답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C.S. 루이스의 지적 토론을 담은 연극 ‘라스트 세션’. 배우 신구는 초연부터 프로이트를 연기하며 관객과 만나고 있다. 루이스 역은 이상윤 카이가 맡았다. [파크컴퍼니 제공]

형이상학적 담론이 채워진 연극임에도 무대가 오로지 진지하게 흘러가지만은 않는다. 영국식 유머가 간간이 등장해 치열한 논쟁에도 웃음이 피식 나온다.

첫 만남부터 지각한 루이스가 요란하게 짖어대는 개 소리에 대해 묻자 프로이트는 “저 녀석도 약속 안 지키는 것을 싫어한다”고 꼬집고, “‘믿습니다’ 하면 구강암이 ‘할렐루야!’하고 사라지겠다”며 적당한 유머와 얄궂은 지적을 섞어 자신의 주장을 관철한다. 유연한 몸짓으로 낭창거리는 긴 칼을 겨누는 펜싱 경기처럼 줏대있는 가치관으로 각자의 세계를 일군 두 학자는 성숙한 비판과 존중의 대화를 주고 받는다.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금세 90분이 지나있다.

이 연극은 물음표로 가득 차있다. 두 학자의 논쟁에 빠지면서도 어느 한 쪽이 맞는다는 식의 답을 쉽게 내리기 어려운 탓이다. 끊임없이 물음표를 던지는 배우들 적에 관객도 여러 철학적인 주제들에 대해 물음표를 품은 채 극장을 나선다. 그 때부터 연극은 또 다시 시작된다. 다른 시대를 살다 간 거장들의 논쟁에 참전하듯 관객은 숱한 후기로 ‘라스트 세션’을 논하고, 원작이나 대본집을 찾아 보며 지적 호기심을 충족한다. ‘사유하는 연극’은 관객들의 자발적 입소문과 재생산을 만들어낸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C.S. 루이스의 지적 토론을 담은 연극 ‘라스트 세션’. 배우 신구는 초연부터 프로이트를 연기하며 관객과 만나고 있다. 루이스 역은 이상윤 카이가 맡았다. [파크컴퍼니 제공]

두 명의 배우가 꾸미는 무대는 단조롭다. 프로이트의 서재를 배경으로 단 한 장면도 바뀌지 않는다. 오로지 말과 연기의 힘으로만 밀어붙인다.

초연부터 프로이트를 연기한 신구는 이번 시즌에서 인공 심박기에 의지해 무대에 섰다. 그는 공연 준비 과정에서 “대본을 계속 읽어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고, 오랫동안 토의해도 쉽게 답이 안 나오는 부분들이 있었다”며 “그런 만큼 더 정확하게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대사의 홍수에도 노배우의 입은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쩌렁쩌렁하게 극장을 울리다가도 이내 속삭거리고, 고집 센 학자부터 구강암으로 고통받는 노인의 모습까지 온전히 프로이트였다. 연극은 9월 10일까지이나, 신구가 출연하는 회차는 이미 전석 매진됐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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