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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촬영 금지”라던 어셔도 자포자기…조성진, ‘영웅’ 마치자 일제히… [고승희의 리와인드]
2년 만의 조성진 전국 리사이틀
9일 부천아트센트 첫 피아노 연주
라벨 ‘거울’부터 슈만, 브람스까지
앙코르 쇼팽 ‘영웅’ 이후 일제히 기립
조성진이 지난 9일 경기 부천아트센터를 찾아 관객들과 만났다. [부천아트센터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심장이 쫄깃해졌다. 아찔하고 짜릿했다. 쇼팽의 폴로네이즈 6번 ‘영웅’이 흐르는 7분간 음표마다 심장이 반응했다. 웅장한 교향악단의 화음을 만들어내는 힘을 실은 연주에 조성진은 수도 없이 몸을 들썩였다. ‘영웅’은 거침없이 진군했다. 용맹한 기상엔 희망이 도사렸다. 선율은 대중음악 최신 트렌드인 ‘스페드 업(Sped up)’ 버전을 이식한 것처럼 달려나갔다. 그 때마다 더 정확하게 안착하는 터치들이 쾌감을 불러왔고, 쿵 하고 내딛는 발구름은 음악이 됐다. 7분이 지나자, 1445명의 관객들은 일제히 일어나 함성과 박수를 보냈다. 세 번째 앙코르 곡이었다. 이날 공연은 커튼콜 때에도 모든 촬영을 금지했다. 콘서트홀의 어셔들은 행여라도 켜지는 휴대폰 카메라를 통제하느라 분주했다. ‘영웅’을 마친 이후엔 자포자기였다. 1층부터 3층까지 가득 메운 관객들은 오래 참았다는 듯 휴대폰 카메라를 열어 조성진을 담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비명같은 함성은 덤이었다. 여기가 바로 BTS였고, 브루노 마스의 공연장이었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리사이틀이 처음으로 열린 지난 9일 오후 부천아트센터. 공연 시작 두 시간 전부터 1층 로비엔 긴 줄이 이어졌다. 5월부터 개관 공연을 진행 중인 부천아트센터를 찾은 ‘클래식 스타’의 공연은 역대 최고의 흥행이었다. 오락가락하는 빗줄기를 뚫고 전국에서 찾아온 관객들은 부천아트센터 로비를 한 바퀴 빙 둘러 줄어 서서 조성진의 사인CD를 사갔다. 티켓 발권 행렬도 하염없이 이어져 급기야 공연은 10분이나 늦게 시작됐다.

조성진의 등장은 ‘기습 작전’을 방불케 했다. 예정된 공연 시간이었던 오후 5시. “공연이 10분 늦게 시작된다”는 안내방송이 나온 이후 관객들이 방심한 틈을 타, 10분이 되자마자 등장해 피아노에 앉았다.

조성진이 지난 9일 경기 부천아트센터를 찾아 관객들과 만났다. [부천아트센터 제공]

사실 부천아트센터에서 피아노 리사이틀이 열린 것은 조성진이 처음이다. 빈야드(포도밭) 형태와 직사각형 형태의 슈박스를 결합한 ‘하이브리드 공연장’인 부천아트센터는 클래식 전용홀을 표방하며 음향시설에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다. 1~3층까지 객석의 편차없이 ‘평등한 음향’을 전달하는 것이 이 공연장의 강점이다. 오케스트라 소리의 어우러짐을 잘 살려내면서도, 소리 하나 하나 선명하게 살아있어 연주 실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공간인 만큼 클래식 애호가들 사이에선 피아노 리사이틀의 음향도 ‘초미의 관심사’였다.

첫 곡은 브람스의 ‘피아노 소품’이었다. 연주는 다소 묵직하고 축축한 소리로 시작됐다. 앞서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같은 음악을 연주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소리였다. 음표들은 물기를 잔뜩 머금은 것처럼 먹먹한 소리를 냈다. 분위기가 달라진 것은 2곡이 시작되면서다. 어릿광대의 안내에 따라 미로를 탐색하듯 미지의 세계로 조성진과 함께 떠나는 여행이었다. 그 안으로 촘촘히 스며드는 비극의 정서가 곡의 색깔을 다채롭게 만들었다. 소리는 피아노 소품이 한 곡 한 곡 지나갈 때마다 서서히 나아졌다. 5곡에 이르자 층층이 음의 레이어가 쌓여 만들어낸 격정이 온전히 전달됐다.

조성진이 지난 9일 경기 부천아트센터를 찾아 관객들과 만났다. [부천아트센터 제공]

라벨의 ‘거울’은 조성진이 이번 리사이틀을 통해 처음 선보이는 곡이었다. 소리는 더 선명하고 섬세해졌다. 가뿐하고 민첩하게 날아오르는 나방의 날갯짓은 살이 베일 만큼 예리했다. 쉼 없이 펄럭이는 나방의 움직임은 폭력적으로 요동치다, 2곡 ‘슬픈 새들’에 접어들자 깊은 음울이 덮쳐와 한 번의 숨조차 내쉬기 어려운 상황으로 관객들을 몰아넣었다. 맑고 청아하지만 유약하지 않았다. 자신 안에 숨어든 또 다른 내면을 끌어내는 듯 하면서, 온전히 자기 자신인 것 같은 연주였다. 슬퍼도 하염없이 웃는 어릿광대의 몸부림은 골짜기의 종(5곡)으로 향하고, 조성진의 발과 나무 바닥이 맞닿아 나는 소리마저 피아노를 지지하는 또 다른 악기처럼 들려왔다. 조성진의 다양한 감정 표현과 기량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곡이었다.

이날의 명연은 슈만의 ‘교향적 연습곡’이었다. 1부와는 완전히 달라진 음색으로 그만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갔다. 곡의 제목 그대로, 피아노로 듣는 오케스트라 연주의 시작이었다. 때때로 조성진의 왼손은 현악기와 같았고, 콘서트홀로 새어나오는 숨소리는 목관악기 같았다. 그 위로 가볍게 날아올라 선명하게 반짝이는 소리를 내며 안착하는 음표들이 거룩한 아름다움을 만들어갔다. 이 곡에서 조성진은 ‘밀당의 달인’이었다. 템포를 쥐락펴락하자 경쾌하면서도 짜릿한 순간들이 만들어졌다. 한 겹 한 겹 쌓아올린 소리들은 음폭을 키웠다. 수많은 현들이 치열하게 달려들어 피아노와 대결을 벌이는 것 같다가도 사이좋게 서로를 응원하는 지원군 같은 소리가 피아노 한 대로 만들어졌다. 변주의 변주를 거듭하며 변칙적으로 밀어붙이는 담대한 연주에선 또 한 번 진화한 조성진을 만날 수 있었다.

조성진이 지난 9일 경기 부천아트센터를 찾아 관객들과 만났다. [부천아트센터 제공]

조성진 리사이틀 주간은 이제 막바지를 향하고 있다. 지난 4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시작된 이번 리사이틀은 무려 2년 만에 여는 전국 투어다. 프로그램의 구성도 두 가지다. 헨델의 ‘건반 모음곡 5번’과 구바이둘리나의 ‘샤콘’, 브람스의 ‘헨델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 브람스의 ‘피아노 소품’, 슈만의 ‘교향적 연습곡’을 연주하는 일정과 브람스의 ‘피아노 소품’, 라벨의 ‘거울’, 슈만의 ‘교향적 연습곡’으로 이어진 일정이었다. 이제 남은 일정은 두 번. 12일 울산, 15일 강릉 공연을 마친 뒤 오는 11월엔 안드리스 넬손스가 지휘하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의 협연(11월 15~16일, 예술의전당)으로 국내 관객과 만난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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