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소·발행사 유동성 규제 없어
FTX, 고객 돈으로 계열사에 대출
법·제도 없어 투자자 보호 불가능
“결국 터질 게 터졌다.”
글로벌 가상자산거래소 FTX의 파산 신청에 대한 금융시장의 반응이다. 가상자산 생태계의 핵심으로 꼽히는 코인거래소에 대해 지적됐던 내부통제와 보안 등의 허점이 이번 사태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질 가능성도 크다. 전통적인 금융시스템에서는 유사시 중앙은행이나 예금자보호기구 등이 나서 투자자 피해를 줄일 수 있다. 가상자산 생태계에는 이 같은 시스템이 없어 모든 피해는 투자자들이 감수해야 한다. 2008년 리먼브러더스 파산 때보다 더 취약한 상황인 셈이다. ▶관련기사 3면
▶FTX, 어쩌다 파산까지=FTX그룹은 거래소 FTX, 투자회사 알라메다(ALAMEDA)가 양대 축이다. FTX는 투자자의 거래 편의를 위해 FTT라는 코인을 발행한다. 현금 대신 이 코인으로 거래하면 수수료와 스테이킹 등에서 혜택을 준다. 이번 사태 전 FTX가 FTT 발행 등으로 확보한 고객자산은 160억달러에 달했다. 하지만 지난 11일 파산신청 직전 FTX의 현금성자산은 10억달러도 채 되지 않았다. 부채만 90억달러에 달했다.
알라메다는 활발한 투자활동을 벌여왔다. 미국에서 코인을 사서 값이 더 비싼 다른 나라에서 파는 차익거래는 물론 가상자산 가격 급락으로 경영이 어려워진 생태계 내 관련 업체에도 적극적으로 돈을 빌려주거나 투자를 했다. 최근 월스트리트저널(WSJ)은 FTX가 알라메다에 100억달러의 고객 돈을 빌려줬다고 익명의 관계자를 인용해 보도했다. 고객 돈에 손을 댈 정도로 알라메다의 투자결과는 좋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알라메다는 외부에서도 15억달러를 차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알라메다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FTX가 고객 돈까지 빌려줬지만 그마저도 다 잃은 것으로 보인다.
▶생선가게 맡은 고양이...보안 문제까지=가상자산거래소는 고객의 자산까지 직접 관리한다. 제3자에 감시나 관리를 맡기는 전통의 금융시스템과 다르다. 거래소가 고객 자산을 안전하게 관리하지 못하면 불안한 투자자들이 대규모 인출에 나서며 유동성 위기에 처할 위험이 존재한다.
FTX 사태로 우려는 현실이 됐지만 비슷한 사태가 다시 벌어져도 막을 길은 없다. 가상자산거래소에 대한 감시를 강화할 법적 근거가 없어서다. 주요 코인거래소들이 자사의 유동성에는 문제가 없다는 발표를 잇달아 내놓고 있지만 의심은 계속 확산되는 모습이다. 지난 13일 글로벌 15위 거래소인 크립토닷컴이 발행하는 크로노스 가격이 급락했다. 다른 거래소인 게이트아이오와 부족한 유동성을 서로 채워주는 ‘돌려막기’를 했다는 의혹이 일면서다.
설상가상으로 FTX 사태에는 보안 문제까지 겹쳤다. FTX는 파산신청 직전인 지난 11일 4억7700만달러어치의 가상자산을 도둑맞았다. 대규모 보안 사고도 거래소의 유동성 부족을 야기할 수 있다. 인터넷망에서 분리된 별도의 하드웨어(cold wallet)에 보관하면 해킹은 막을 수 있지만 물리적 보안이 숙제로 남는다.
▶명분은 자율, 현실은 무법=가상자산 생태계의 철학적 바탕은 국가권력이나 중앙은행을 배제한 민간자율이다. 이론적으로는 문제가 발생해도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최근 몇년 새 시장이 급팽창하며 가상자산 생태계의 사건은 전통 금융시스템에도 상처를 낼 정도로 파장이 커졌다. 아무리 자율이라지만 그냥 방치하기 어렵게 됐다.
아직 국내 거래소에서는 큰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다. 예방 기회는 있는 셈이다. 여야 모두 가상자산관련 법안을 국회에 제출한 상황이다. 규제와 진흥을 아우르는 포괄적인 법안은 아니지만 투자자보호를 위해 가상자산 사업자에 대한 금융당국의 감시를 강화하는 내용을 공통적으로 담고 있다. FTX 사태로 내용이 다소 미비하더라도 일단 법과 제도를 만들자는 주장이 힘을 얻을 전망이다. 홍길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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