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규상 금감원 사전승인 필요
외환관리 위해 기재부도 개입
신뢰훼손 파장 사전예측 못해
결정 번복, 명분·실리 다 잃어
기업 자금조달 부담만 더 커져
“흥국생명이 신종자본증권 조기상환을 하지 않은 것과 관련 당국의 개입이 필요했던 것 아닌가”
지난 7일 열린 금융감독원장과 외신기자 간담회에서 나온 질문이다. 이복현 원장의 답은 이랬다.
“조기상환 스케쥴은 알고 있지만 시스템적으로 사전 개입은 쉽지 않은 측면이 있다. 시장에서 신종자본증권의 조기상환에 대한 기대가 있는 점과 흥국생명 측의 자금여력도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시간을 두고 지켜볼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보험업감독규정 제7-11조의2 1항은 ‘보험사가 신종자본증권을 중도 상환하려는 경우에는 감독원장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정하고 있다. 신종자본증권이 보험사의 건전성과 직결되는 만큼 중도상환 여부에 대해 금감원이 반드시 사전에 그 영향을 따져야 한다는 뜻이다.
또 2항에서는 신종자본증권의 세부요건, 조기상환 요건, 신고절차 등 그 밖에 필요한 사항을 감독원장이 정하도록 했다. 보험사의 신종자본증권은 발행 단계부터 금감원이 면밀히 살피도록 한 셈이다.
흥국생명과 DB생명이 신종자본증권으로 조달한 자금을 중도상환을 하려 했다면 금감원 승인을 반드시 구해야 했다. 그런데 중도상환을 하지 않기로 하면서 금감원과는 사전협의 절차를 거치지 않았을까? 이론적으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금감원은 지난 2일 흥국생명의 조기상환권 미행사에 금융시장이 불안한 반응을 보이자 “금융위, 기재부, 금감원 등은 관련한 일정, 계획 등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으며 지속적으로 소통해 왔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시스템적으로 사전 개입은 쉽지 않았다는 이 원장의 발언과는 차이가 있다.
또 하나 눈여겨 볼 부분은 자료에 등장하는 ‘기재부’다. 금융회사 관련 주무부처는 금융위다. 흥국생명 신종자본증권이 외화채권이기 때문이다. 액수도 무려 5억 달러나 된다. 외환관리는 기재부 담당이다. 최근 환율이 급등하는 상황에서 기재부 입장에서는 무려 5억 달러의 외화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고 싶었을 수 있다. 게다가 흥국생명과 DB생명은 보험업계에서 그리 비중이 큰 회사들도 아니다.
종합하면 이번 사태는 흥국생명 스스로도 환율과 금리 부담에 조기상환권 미행사를 선호했을 수 있지만 정부와 금융당국도 이를 종용하거나, 최소한 묵인했다고 봐야 한다. 정부도 조기상환권 미행사가 시장에 미칠 영향을 충분히 예상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7일 흥국생명과 DB생명은 당초 결정을 번복해 신종자본증권 조기상환권을 행사하기로 했다. 권리행사를 금감원이 승인했다는 뜻이다. 당국이 나서면서 4대 은행이 환매조건부채권(RP) 매입 형식으로 흥국생명에 4000억원을 빌려주기로 했다.
지난 2일 금감원은 보도자료에서 “흥국생명은 채권발행 당시의 당사자간 약정대로 조건을 협의·조정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판단하였다”고 했다. 결론적으로 당시 흥국생명이 합리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거나,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 회사에는 불리한 선택을 다시 한 모양이 됐다.
소탐대실(小貪大失)이다. 신뢰가 중요한 신용시장의 불안으로 채권금리 상승은 물론 대외위험지표인 CDS(신용부도스와프) 프리미엄까지 올라 기업들의 자금조달 비용만 더 높아졌다. 5년 짜리 차입으로 부족한 자본을 채워 온 국내 금융회사의 취약한 재무구조도 드러났다. 결정은 번복됐지만 금이간 신뢰는 단기간에 회복되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레고랜드 사태’에 이어 또다시 값 비싼 망신이다.
kyhong@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