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시장의 금기사항 깨뜨려
금융사 사이비 자본에 경각심
대책 없으면 확산 가능성 커
세상이 어지러울 때 주로 기세를 올리는 것이 ‘겉은 비슷하지만 속은 같지 않은’ 사이비(似而非)다. 혼란한 와중에는 사리분별이 쉽지 않다. 사이비가 때로는 진짜와 비슷한 효과를 내는 듯하지만 본질적으로 다른 만큼 결정적 순간에 한계를 드러낸다. 사이비를 진짜로 믿으면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흥국생명에 이어 DB생명도 신종자본증권 조기 상환을 하지 않기로 했다. 금융당국과 해당 업체는 “굳이 안 갚아도 된다”고 항변한다. 시장 평가는 다르다. 투자자들은 “사실상 조기 상환을 전제로 돈을 빌려줬는데 이런 믿음이 깨졌으니 앞으로 비슷한 형태로는 투자하기 어려울 것”이란 반응이다.
고객과 계약자 보호, 금융 시스템 안정 등을 위해 금융회사들은 일정 비율 이상의 자본을 유지해야 한다. 보통 자본은 주식 형태지만 예외적으로 일부 채권을 자본으로 인정한다. 주식으로 전환될 수 있는 채권이나 만기가 아주 길어 당장엔 상환 부담이 없는 채권이다. 신종자본증권은 후자다.
지난 6월 취임한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증권사들의 단기조달 관행에 따른 장단기 만기불일치 위험과 함께 대주주들의 자본확충 회피 문제를 꼬집었다. 이 원장은 대주주들이 제 돈 들어가는 증자 대신 차입자본을 늘려 자본규제를 맞추려 한다는 지적이다. 부동산PF와 증권사 단기차입 문제는 자금시장 경색으로 이미 현실화됐다. 이번엔 유사자본 문제까지 드러나면서 이 원장의 ‘촉’이 적중한 셈이다.
은행권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보험사들은 지난 2017년 이후 신종자본증권 발행으로 자본을 보강해왔다. 주주들은 주식가치 희석을 막으면서 자본을 확충할 수 있어서, 투자자들은 일반 채권보다 높은 금리를 받을 수 있어 발행이 꽤 활발했다. 금리가 계속 하락하면서 발행자는 콜옵션 행사 후 더 낮은 이자율로 다시 발행을 하기도 쉬웠다. 금리가 오르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발행자는 더 높은 금리로 차환하는 부담이 생겼다. 최근 자금시장 경색으로 콜옵션을 행사하지 않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투자자 입장은 다르다. 금융회사는 자본을 보강하기 위해 신종자본증권을 발행하지만 투자자로서는 30년의 긴 만기로 투자하기 어렵다. 그래서 발행자가 조기 상환하도록 옵션을 붙인다. 보통 5년이다. 표면상 만기는 30년이지만 실질적으로는 5년이 지나 회수하려 돈을 빌려준 셈이다. 옵션이 있고 없는 차이는 분명하다. 채권금리는 회수위험에 따라 결정된다. 조기 상환이 안 된다면 애초에 훨씬 더 높은 금리를 요구했을 것이다.
금융회사들의 신종자본증권이 ‘사이비’가 되면 재무건전성 평가 기준도 달라질 수 있다. 금융회사 기업가치는 순자산 대비 시장가치가 어떤지를 나타내는 주가순자산비율(PBR)로 측정한다. 이번 사태가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으면 투자자들은 순자산에서 신종자본증권을 인정하지 않으려 할 수 있다.
국내 금융주들은 대부분 PBR가 1배 미만이다. 자본에 거품이 있거나 자산에 부실이 많다는 의미로도 풀이할 수 있다. 흥국생명, DB생명 사태는 이런 점에서 치명적이다. 앞으로 자본이 부족한 금융회사들이 채권형 자본으로 재무제표를 ‘땜질’하기 어려워졌다. 설령 발행에 성공하더라도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할 수 있다.
이번 사태는 최근 기업들의 자금 사정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드러내는 증거로도 해석된다. 자금시장 경색이 금융회사의 건전성에 대한 불안으로 확대되는 불쏘시개가 될 수도 있다. 내년에는 환율 급등으로 상환 부담이 더욱 커진 외화표시 신종자본증권의 조기 상환도 대거 예정돼 있다.
정부가 최근 자금시장 경색에 대책을 내놨지만 시장 불안은 여전하다. 신종자본증권 사태로 문제가 더 커질 가능성이 커졌다. 내년에는 기업들의 신용등급 줄하향도 불가피해 보인다. 걷잡을 수 없는 악순환에 빠지기 전에 실효성 있는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 현장과 가장 가까운 금융당국이 금융감독원이다. 금융시스템의 취약점을 꿰뚫어봤던 이 원장의 ‘촉’이 대책을 찾는 데도 통했으면 싶다.
kyhong@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