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 ‘화학무기’ 사용 의혹속 美공습 임박…국제사회 위협하는 ‘빈곤 국가의 핵무기’ 실체는
1915년 벨기에 전선, 영국ㆍ프랑스 연합군 참호 속으로 조용히 흰 연기가 스며들었다. 병사들은 불과 수십분 만에 피부와 살이 짓무르고 폐에 염증을 일으켜 고통스럽게 죽어갔다.하루 만에 5000여명의 희생자를 낸 독일군의 이 신병기는 ‘염소가스’. 1차 세계대전 당시 벨기에 전선 이프르 전투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화학무기다. 전쟁 기간에 양 진영 통틀어 130만명의 사상자를 내 심각성을 인지한 국제사회가 화학무기 사용을 규제하기 위해 1925년 ‘제네바 의정서’를 채택하고 ‘화학무기 금지 협약(CWC)’까지 체결했지만, 지금도 죽음의 연기는 소리 없는 재앙이 돼 구시대의 망령처럼 가끔씩 등장하며 세계인을 두려움에 떨게 하고 있다.
최근 세계는 시리아 정부군의 화학무기 사용으로 인해 또 한 번 들썩였다. 사린가스로 추정되는 화학무기로 인해 수천명이 희생됐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유엔 화학무기조사단이 급파됐다. 미국은 사린가스 사용 증거를 확보했다며, 단독으로라도 무력 개입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이제 시리아는 풍전등화다.
▶시리아ㆍ북한, 화학무기 보유하며 왜 국제사회 왕따를 자처하는가=시리아는 CWC에 가입돼 있지 않기 때문에 보유하고 있는 화학무기의 종류나 양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지난해 9월 미국의 유력 일간지 워싱턴포스트가 서방의 첩보기관을 인용한 보도에 따르면 수백t의 화학무기가 전국 20여개 지역에 분산 배치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와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 중인 북한 역시 정확한 보유 규모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국제위기감시기구(ICGㆍInternational Crisis Group)에 따르면 북한의 화학무기 보유량은 2500~5000t에 이르는 것으로만 전해졌다.
그러나 보유량보다 더욱 위협적인 것은 생산량이다. 북한의 화학무기 연간 약 5000t, 전시에는 최대 1만2000t까지 생산량을 늘릴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관측이다.
(왼쪽부터) 방독면을 쓰고 ‘AK-47’ 소총으로 무장한 시리아군, 1차 세계대전 당시 있었던 독일군의 화학무기 공격, 1943년 미국 콜로라도 커머스 시 로키마운틴 무기고에 위치한 탄두의 단면. 화학무기의 투발 수단은 매우 다양하다. |
핵위협 전문 분석기구 NTI는 북한 내 4개 부대가 화학무기를 배치하고 있으며, 11개 시설에서 생산 및 저장하고 13개 지역에서 연구ㆍ개발을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이 중 2개 시설은 평안북도 강계와 삭주 인근에 위치해 있는 것이 유력한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과 시리아 등이 화학무기 폐기에 동참하지 않는 이유는 화학무기가 가진 여러 장점 때문이다. 북한은 군사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핵무기ㆍ생물학무기와 더불어 화학무기를 비대칭 전력으로 유지하고 있다.
화학무기는 적은 양으로도 광범위한 지역에 피해를 줄 수 있다. 1000t이면 4000만명을 살상할 수 있어 재래식 무기에 비해 인명 살상 효과가 크고 위협적이다. 투발 수단이 다양하다는 것도 장점이다. 미사일은 물론 포탄에 실어나를 수도 있고, 심지어 박격포로도 날릴 수 있다. 그것마저도 부족하다면 항공기를 이용한 직접 살포도 가능하다.
무엇보다도 이들이 화학무기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저렴한 가격 때문이다. 개발비용이 적고 신속한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 또한 핵무기보다 관리ㆍ유지비용도 적게 들 뿐만 아니라 다량 비축이 가능하다. ‘빈곤 국가의 핵무기’라고 불리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화학무기 감축을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 CWC로 미국도 90% 줄여=화학무기는 1980년대 미국과 구소련을 중심으로 감축 논의가 있었다. 결국 동구권이 무너진 1991년, 미국이 본격적으로 화학무기 폐기를 선언하고 나서면서 1992년 유엔 총회에서 CWC가 의결됐다. 1997년 발효된 이 협약에는 전 세계 189개국이 가입해 있으며, 시리아 북한 이집트 남수단 앙골라 등 5개국만이 CWC 가입을 거부한 국가다.
화학무기금지기구(OPCW)가 조약 발효와 함께 설립됐으며, 화학무기 금지 및 확산 방지를 위해 각국 감시 및 시찰 업무를 한다. OPCW에 따르면 화학무기는 4단계에 걸쳐 2012년까지 전량 폐기하기로 했으나 2012년 5월까지 전 세계적으로 신고된 것 중 71.1%인 5만619t의 화학무기가 폐기 처분된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은 3만1500t의 화학무기 중 90%를 감축했고, 오는 2023년까지 폐기 기한을 연장하기로 했다. 보유량이 4만t으로 가장 많았던 러시아는 57%의 감축량을 보이고 있으며, 지난해까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해 역시 2015~2020년 사이에 폐기할 것을 약속했다. 리비아 역시 2016년을 목표로 85% 비축량을 줄였다.
1044t의 화학무기를 보유한 인도는 지난 2009년 전량 폐기를 마쳤고, 일본은 2022년까지 감축을 완료하기로 했다. 1997년 CWC에 가입한 한국은 지난 2008년 전량 폐기를 완료했다.
문영규 기자/ygmoon@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