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아시아를 뒤흔든 외환위기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다.
‘외국인 자본이탈→주식시장 폭락→통화가치 급락→외환보유액 급감ㆍ금리급등→외환위기’라는 이른바 주가ㆍ통화ㆍ채권이 동시에 하락하는 ‘트리플 약세’ 공식이 16년이 지난 현재 다시 재연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경기둔화로 인한 수출 감소와 경상수지 악화도 닮은꼴로 지적되고 있다.
하지만 무함마드 엘 에리언 핌코 최고경영자(CEO)는 “신흥시장이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는 있지만 1990년대에 비해 체질이 탄탄해졌기 때문에 그때 같은 붕괴 위험은 없다”고 역설했다. 엘 에리언은 신흥국에서 “매우 탄탄한 외환보유액이 완충 역할을 하고 있고, (1990년대에 비해) 정책 신뢰도가 높으며 환율도 유연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모두가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대부분은 1990년대에 비해 스스로에 훨씬 더 높은 보험을 들어둔 상태”라고 덧붙였다.
또 1997년 IMF에서 아시아 지역을 담당했던 스티븐 슈바르츠 BBVA 아시아 부문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만약 아시아 금융위기를 10 정도로 본다면 현재 상황은 3 수준”이라면서 “이번 사태는 단기적인 현상이며, 조만간 지나갈 것으로 본다”고 평가했다.
▶이것이 똑같다=최근 신흥국 상황은 선진국의 통화정책이 긴축으로 돌아서면서 대규모 자금이 이탈하고, 경상수지가 악화하며 단기 외채가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 1990년대 상황과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1990년대 자본 자유화와 함께 고속 성장하는 동아시아 신흥국으로 외국인 투자 자금과 함께 핫머니(단기성 투가자본)가 대거 몰려들었지만 글로벌 자금 유입으로 통화가치가 오르면서 무역 수지가 악화하고 그로 인해 성장세가 둔화되면서 고속성장에 가려졌던 경제 구조적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이는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을 포함한 선진국이 시장에 풀어놓은 막대한 유동성이 신흥국으로 유입됐지만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양적완화 축소 우려에 글로벌 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현재와 닮아 있다.
글로벌 투자자들은 미국 출구전략에 따른 금리상승으로 신흥국 투자금에 대한 조달 비용이 높아질 수 있는데다 금리가 오른 미국 채권 등에 투자하기 위해 뉴욕행을 서두르고 있는 탓이다.
또 위기 발생 2~3년 전부터 신흥국의 외채가 빠르게 증가하고 경상수지 적자 폭이 확대되며 외환 보유액이 감소한 점도 위기의 전철을 밟고 있다.
태국은 1990년대 중반부터 경상수지 적자가 가중됐고 태국 주가와 바트화 가치는 위기 당시 50% 이상 폭락했다. 이는 현재 인도와 인도네시아가 대규모 경상적자에 시달리면서 통화가치와 주가가 폭락하고 있는 것과 중첩된다.
외환보유액이 감소하고 있는 것도 우려되는 대목이다. 16년 전 태국과 인도네시아, 한국은 환율 방어를 위해 외환보유액을 대거 풀어 환시장 개입에 나섰지만 위기 진화에 실패했다. 현재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 움직임으로 신흥국의 외환보유액은 지난 5월부터 7월까지 3개월간 810억달러(약 91조원)가 증발했다. 이는 전체 신흥국 외환보유액의 2%에 해당한다.
▶이번엔 다르다=하지만 2013년판 아시아 금융위기 우려는 1997년과 7가지 측면에서 다르다.
우선 환율제도가 다르다. 1990년대 신흥국들은 고정환율제를 시행했지만 현재는 대부분 변동환율제를 채택하고 있어 외화 수급에 따라 환율이 변동해 헤지펀드의 공격에 1997년보다 더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다.
둘째는 높은 외환보유액이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80억 달러에 불과했던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3300억 달러로 증가했다. 태국은 IMF 구제금융 신청 당시 외환보유고가 ‘제로’ 수준이었지만 현재는 1700억달러를 보유하고 있다.
셋째는 단기외채 비중이 낮다는 점이다. 한국투자증권 전민규 애널리스트는 “단기 외채 비중이 높지 않고 외환보유액이 단기 외채에 비해 훨씬 많아 당장 위기가 발생할 가능성은 낮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1996년 말 태국과 인도네시아의 단기외채/외환보유액 비율은 각각 123%, 181%를 기록했다. 한국은 무려 228%에 달했다. 하지만 2013년 1분기 현재 태국과 인도네시아의 비율은 각각 35%와 46%로 낮아졌다. 한국과 인도도 각각 37% 수준에 머물고 있다.
넷째는 금융시장의 투명성이다. 오늘날 모든 국가는 외환보유고나 부실채권 등 정보를 모두 공개하고 있다.
다섯째는 신흥국의 경상수지가 엇갈리고 있는 점이다. 과거엔 인도, 인도네시아, 태국은 물론 홍콩, 한국, 필리핀이 모두 경상수지 적자 국가였다. 오늘날에는 인도와 인도네시아 태국 말레이시아가 경상 수지 악화를 겪고 있는 반면, 홍콩, 필리핀, 한국의 경상수지는 여전히 흑자를 기록 중이다.
여섯 째는 은행감독 시스템의 개선이다. 1990년대는 은행 감독 시스템은 탄생 초기여서 부실기업 대출이 횡행했지만 오늘날 아시아 금융권의 감독은 자동차ㆍ부동산ㆍ소비자 대출 등 전분야에서 훨씬 엄격해졌다.
마지막으로 중국의 위상이 달라진 점도 주목할 만하다. WSJ은 “1997년 위기 전에는 일본이 아시아 각국의 경제성장을 견인했지만 2000년대는 중국이 세계 경제대국 2위로 올라섰다”며 외환보유액이 3조5000억 달러로 세계 1위라는 점을 상기시켰다.
천예선 기자/cheon@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