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의 정치’ 실천하는 독일
# 1970년 12월 7일. 스산한 날씨에 매서운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의 2차세계대전 유대인 희생자 위령탑 앞. 쉰일곱 살의 독일 정치인이 헌화 도중 털썩 무릎을 꿇었다. 수행원들은 당황했고 주변에서는 현기증 때문이라고 수군댔다. 하지만 그는 한동안 고개를 숙인 채 일어나지 못했다. 그의 양복바지는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무심한 듯 내리는 빗물에 젖어 들어갔다.서독 빌리 브란트 전 총리의 이야기다. 그는 이날 히틀러에 학살당한 600만 유대인들의 집단수용소였던 ‘게토’의 무장봉기 전몰자 묘지에서 무릎 꿇고 사죄했다. 당시 브란트 총리는 “나는 역사의 무게에 눌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때 행동을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세계 언론은 “그날 무릎을 꿇은 것은 한 사람이었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전체였다”고 평가했다.
2차세계대전 히틀러 체제하에서 반인륜적 범죄를 저질렀던 독일은 전후 패전국이라는 피폐한 삶 속에서도 이웃 국가에 대한 사죄의 정치학을 몸소 실천했다.
독일은 국가 정상의 사죄와 피해보상금 지급은 물론 영토 반환과 공통의 역사교과서 편찬 등 뼈아픈 과거사 반성을 통해 주변국과 화해하고 패전 이후 다시 유럽의 경제적, 정치적 맹주로 자리 잡는 데 성공했다.
▶대물림되는 사죄=독일 수뇌부의 사죄는 일회성에 그치지 않았다. 1994년 8월 로만 헤르초크 독일 대통령은 폴란드 바르샤바 위령탑 앞에서 다시 한 번 잘못을 빌었다. 그는 “독일 사람이 폴란드 사람들에게 저지른 행위에 대해 용서를 빈다”고 말했다. 독일 정부가 아닌 독일 ‘사람’이라고 말해 반성의 의무는 다음 세대로 대물림된다는 의미를 강조했다.
앙겔라 메르켈 현(現) 총리도 동참했다. 지난 1월 27일 메르켈 총리는 홀로코스트 유대인 학살 추념일을 맞아 자신의 웹사이트에 “인종차별과 반유대주의가 다시는 발을 붙일 수 없도록 모든 개인이 용기를 갖고 임해야 한다”며 “우리는 이 점을 세대를 이어가며 분명히 말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영토 반환, 그리고 끝없는 보상=독일의 사죄에는 책임 있는 피해보상도 잇따랐다. 독일 정부는 1939년 폴란드에서부터 시작된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홀로코스트’의 피해보상금으로 현재까지 700억달러(약 80조원)를 썼다. 지난 5월에는 10억달러를 추가로 내놓기도 했다. 스튜어트 아이젠스타트 대독유대인청구권회의 협상단 대표는 “긴축재정 압박 속에서도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에 대한 책무를 다하려는 독일 정부에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독일은 또 패전 직후 영토를 반환했다. 독일 정부는 폴란드에 오데르-나이센선 동쪽 지역 영토 11만㎢를 떼어줬고, 1800년대부터 독ㆍ불 긴장의 진앙지였던 알자스로렌 지방은 완전히 프랑스의 손에 넘겼다.
▶전범자 추적, 지구 끝까지=독일은 나치에 동조한 전쟁 범죄자들을 단죄하는 데 공소시효를 두지 않고 있다. 지난달에는 90세의 폴란드 유대인처형소 경비병이었던 사무엘 쿤츠가 유대인 학살에 가담한 혐의로 기소됐다.
갈등의 소지가 되는 역사 인식은 공통 교과서 편찬으로 극복하고 있다. 2003년 독일의 게르하르트 슈뢰더와 프랑스의 자크 시라크 정상이 공통의 역사교과서 편찬에 합의한 지 3년 만에 결실을 봤다. 독일 전역에서는 이 교과서를 역사수업 교재로 사용하고 있다.
나치의 상징 깃발인 ‘하켄크로이츠’는 패전 이후 독일 형법에 따라 사용이 금지됐다. 공공장소에서 나치 문양을 전시하면 ‘반(反)헌법조직 상징물 금지법’에 의해 3년 이하의 금고 또는 벌금형에 처해진다.
천예선 기자/cheon@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