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朴대통령님, 젊은작가 그림 한점 사주시죠”
미술에 빠진 경제학자 서진수 교수 “창조경제 핵심은 창조예술”…그가 진단하는 한국미술시장
‘미술=비자금’ 인식 확산속
국내시장 2~3년간 극심한 침체기

美·英·獨, 아트컬렉터 집중 육성
앤디 워홀·잭슨 폴락 등 슈퍼스타 탄생
지금은 경제가 미술을 필요로 하는 시대

창작공간 더 만들어주는 정책보다
작가들의 작품을 사주는게 먼저다



여기 미술에 푹 빠진 경제학자가 있다. 경제사를 전공한 강남대 경제학과 서진수 교수(57)다. 그는 강의가 없는 주말과 방학에는 전 세계 미술품 경매장과 아트페어를 열심히 누빈다. 또 아시아미술시장연구연맹(AAMRU)의 창설을 주도했고, 도쿄와 베이징에서 특강도 여러 차례 했다. 경제학 논문 외에 아트마켓을 분석한 논문을 연달아 발표하고 있다. 모두 피(?) 같은 자기 돈을 써가면서다. 그를 두 차례에 걸쳐 만났다.

-‘미술시장연구소’란 간판을 내건 지 올해로 꼭 10년이다. 지금까지 미술시장 연구를 위해 쓴 돈이 수억대라고 들었다.

▶하하. 맞다. 내 교수 월급의 4분의 1은 썼으니까. 강연료와 원고료도 모두 쏟아부었다. 암각화 탐사에도 5년간 5000만원을 썼다. 아트마켓 조사를 위해 도쿄와 베이징은 물론이고 두바이, 베네치아까지 자비로 오가고 있다. 그런데 번 게 더 많다. 난 독특한 사람이라 계산법이 좀 다르다. 인풋(input), 물론 엄청나게 들어갔다. 그러나 아웃풋(output)이 더 많다. 지난 10년간 국내외 주요 경매장과 아트페어를 누비면서 걸작들을 원 없이 봤으니 남는 장사 아닌가. 난 10억원짜리 그림을 봤으면 ‘오늘 1억 벌었네’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수십억, 수백억원대 작품을 수십만점 넘게 보면서 안복을 실컷 누렸으니 난 행복한 사람이다.

-경제학 교수가 왜 미술이냐고 의아해들 한다.

▶그런 질문 많이 받는다. 미술시장연구소를 열면서 ‘미술과 자본의 아름다운 만남’이란 글귀를 전각으로 새겨 내걸었다.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그렇지않다. 문화경제학 연구자로서 요즘은 ‘경제가 미술을 필요로 하는 시대’임을 강조하고 싶다. 그것도 매우 절실하게. 경제가 발전하면 그 끝에는 예술이 있다. 걸작도 그중 하나다. 멋진 미술품은 훗날 인류의 유산이 된다. 패러다임의 시프트가 필요한 시점이다. 

경제학과 교수지만 미술이 좋아 아트마켓을 연구 분석하는 서진수 교수가 최근 서울서 열린 아트페어를 찾았다. 홍경택 작가의‘ pencil’옆에 선 그는 “한국작가 중에는 월드마켓서 통할 작가가 많은데 아쉽게도 체계적인 글로벌 마케팅이 잘 안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사진제공=이순심 포토그래퍼]

-요즘 미술인들은 전례 없는 불황이라고 아우성이다. 위기로 보는가.

▶중국ㆍ일본 전문가들과 함께 연구 중인데 한국시장의 침체가 유독 심하다. 2011년 이래 심각한 침체기다. 대형 화랑들이 규모를 축소하고 있고, 중견 원로작가들은 판매부진 때문에 작품전을 못 열고 있다. 2차 시장인 경매시장도 고가 작품의 거래가 잘 안 되다 보니 좋은 작품의 소싱이 안 된다. 침체기가 길어지면 한국미술의 암흑기가 된다.

-최근들어 ‘미술=비자금, 불법’으로 인식하는 이들이 많다.

▶어느 시대에나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은 있게 마련이다. 극히 일부에서 발생한 불법을 전체로 확대해석하는 건 곤란하다. 선진국 진입을 눈앞에 둔 우리는 분별력을 키워야 하는데 감정을 키우는 예가 많다. 기본적으로 미술시장은 아름답다. 대다수 작가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참아가며 예술혼을 불태우고 있다. 절약과 숱한 망설임 끝에 구입한 조그마한 작품에서 무한한 행복을 느끼는 이들이 더 많다.

-하지만 컬렉터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은 좋지 않다

▶정부와 사회의 시각이 중요한데 요즘 너무 부정적이다.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다. 미술시장이 성숙기에 진입한 미국, 영국, 독일은 정부와 사회가 아트컬렉터에 대해 지원책과 육성책을 썼다. 앤디 워홀, 잭슨 폴락 같은 슈퍼스타도 그래서 탄생했다. 반면에 우리는 작품을 수집ㆍ기부하는 문화가 형성되기도 전에, 부정적인 인식이 먼저 자리를 잡았다. 아트컬렉터가 열정을 다해 수집한 작품은 통상 3세대 정도가 지나면 공공의 것이 된다. 문화선진국의 미술관들이 이를 증명한다.

-미술품에 대해 일반이 오해하고 있는 측면이 있다면?

▶미술품은 ‘예술성’과 ‘가격’이란 두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한국에선 예술성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2005~2007년에 일었던 미술시장 붐 기간에 ‘가격’ 얘기만 팽배했다. 작품의 기준을 가격에만 맞췄던 것이다. 어떤 작가의 작품 성향을 이해하려하기보다 누가 뜰 것인지, 누가 돈이 될 것인지만 관심을 두었다. 

미술품 경매장을 찾은 서진수 교수. 그는 아시아 주요 경매현장을 빠짐없이 찾아 기록, 분석하고 있다.
                                                                                                                                                   [박현구 기자/phko@heraldcorp.com]

-미술이 미래의 중요한 항목이라 보는 이유는?

▶경제개발단계와 성장단계를 지나 한국은 창조경제를 내세우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런데 핵심 창조예술이 발전해야 돈을 번다. 즉 문학, 음악, 연극, 시각예술의 발전이 중요하다. 문화융성국가가 되려면 핵심예술을 육성해야 한다.

-그렇다면 정부는 무얼 해야 하나.

▶제조업 발전 못지않게 소프트한 문화예술이 발달하도록 힘써야 한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우리 IT제품의 판로를 더욱 활짝 열어 주었다. 크리에이티브를 말로만 외칠 게 아니라 기업의 종사자, 국민 모두가 색, 형태, 디자인을 제대로 알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 감성적 수준을 세련되게 끌어올리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미술의 공공(퍼블릭)수요가 거의 없다. 창출안이 있나?

▶한국은 등록미술관이 145개다. 그러나 글로벌 스탠더드로 봤을 땐 고작해야 10개 미만이다. 그마저도 두세 곳을 빼곤 컬렉션 예산이 너무 미미하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연간 작품 구입예산이 30억원인데 100억원대로 늘려야 한다.

-작가를 육성하려면 무엇보다 작품을 사 줘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작품을 사 주는 게 첫째다. 그래야 물감도 사고, 작업도 할 수 있다. 현재 한국의 미술계 종사자는 대략 3만~4만명인데 시장 규모는 고작 연 4500억원이다. 1인당 연평균 약 1100만원에 불과하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이들이 너무 많다. 대통령부터 오는 10월 3일 코엑스에서 개막하는 KIAF(한국국제아트페어)에 들러 그림 한점 사 주었으면 좋겠다. 큰 힘이 될 것이다.

-1인 3, 4역을 소화하느라 바쁠 텐데.

▶원칙을 정해 놓고 움직인다. 학교 일과 미술쪽 일이 겹치면 단연 학교 일이 우선이다. 가족들과는 일요일 낮부터 밤까지 함께한다는 원칙을 정해 놓고 산다. 또 좋은 미술품을 수없이 마주치다보니 ‘저 그림 사고 싶다’는 유혹에 빠질 때도 있지만 ‘감상만 하자’는 게 원칙이다. 내가 국내외 아트페어, 경매에 수없이 다녀도 아내가 안심(?)하고 있는 건 그림을 사지않기 때문이다.

-지난 10년간 중국미술품이 5~10배씩 뛰는 걸 보며 구매충동을 느끼진 않았는지.

▶펑정지에 등 몇몇 중국작가들과 가깝게 지내 마음만 먹었으면 얼마든지 샀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기록자이자 연구자’라는 원칙을 지키고 있다. 그래서 늘 홀가분하다. 좋은 작품을 보면서 인생의 폭과 깊이가 넓어졌으니 돈 번 것 이상 아닌가. 과거의 나는 고지식하고 규율만 중시했는데 요즘은 훨씬 유연해졌다, 다양성도 인정하게 됐다.

-언제 봐도 무거운 카메라와 수첩, 아이패드를 들고 다니던데.

▶그렇다. 사회과학자로서 자료와 정보는 생명이다. 늘 사진기를 갖고 다니며 현장을 기록하는데 2011년 1만4800컷, 2012년 1만1729컷(81기가바이트)이나 찍었더라. 이를 모두 자료화해 놓았다. 그러니 난 부자다.

-열심히 작업하는 젊은 작가들과 종사자들을 챙긴다고 들었다.

▶개인적으로 동양화 작가와 서예가에게 관심이 많다. 아트페어를 다니다가 우리 작가들이 참고하면 좋을 듯한 작품이 있으면 사다주곤 한다. 힘내라고 가끔 밥도 산다. 직장을 그만둔 젊은 딜러에게 ‘홍콩마켓 좀 참관해보라’고 데려간 적도 있다. 이들이 힘을 내 한국미술계가 좀 더 풍성해졌으면 좋겠다.

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
연재 기사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