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국 통화·주가·채권값 폭락 글로벌 금융시장 대충격…내주 FOMC서 양적완화 축소 시점 논의
‘신의 한수일까, 임기 말 세계 금융 대통령의 뼈아픈 패착으로 기록될까.’글로벌 경기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헬리콥터로 돈을 뿌리듯 3조달러를 시장에 풀어 ‘헬리콥터 벤’이라는 별명이 붙은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 그가 지난달 22일(현지시간) 의회 청문회에서 지난 5년간 뿌린 ‘유동성 소탕 작전’에 나설 것임을 시사해 글로벌 금융시장에 대충격을 주고 있다.
시장은 이와 관련해 ‘대공황 전문가’ 버냉키의 치밀한 계산이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17년간 대공황과 그에 따른 Fed의 역할을 연구한 ‘천재’ 버냉키가 양적완화 축소 이전 시간을 벌면서 자산 급등락을 통해 시장의 내성을 키우려는 복안이라는 것이다.
버냉키의 첫 번째 재물은 신흥국이었다.
버냉키 발언 이후 신흥국 통화와 주가, 채권값은 연일 폭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지난 4년간 이머징 마켓이 블랙홀처럼 빨아들였던 전 세계 유동성의 엑소더스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랜드화와 브라질의 헤알화 가치는 4년래 최저 수준으로 폭락했다. 인도 루피아화는 역대 최저치를 경신했고, 상대적으로 견조했던 필리핀과 멕시코 통화도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있다.
증시와 채권시장도 맥을 못췄다. 주요 신흥국 증시를 반영하는 FTSE 신흥시장지수는 이날 1.7% 하락했다. 5월 고점 대비로는 10% 넘게 급락했다. 채권가격도 하락해 284개 신흥국 채권펀드 중 지난달에 수익을 낸 펀드는 한 곳도 없었다.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주요 외신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Fed를 필두로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시중에 뿌린 12조달러가 넘는 잉여 유동성의 최대 수혜국이었던 신흥국의 파티는 끝나고 있다”고 평가했다.
무차별 돈살포로 ‘잃어버린 20년’을 되찾으려던 일본의 아베노믹스(아베 신조 총리의 경기부양책)도 Fed의 움직임에 흔들리고 있다. 미국이 풀린 돈을 끌어모으기 시작하면 일본이 나홀로 돈을 풀어 경기를 살리기는 역부족이다. 롤러코스터 장세 속에 불안한 투자가들이 상대적 안전자산인 엔화로 몰리게 되면 이제 막 개막한 엔저 시대도 단명할 수 있다.
이제 세계의 관심은 오는 18~19일 열리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 쏠리고 있다. 시장에서는 이번 회의에서 양적완화 축소 시점 논의를 시작하고 9월이나 12월께 유동성 회수 작업을 본격화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전임 앨런 그린스펀 의장의 1994년 기습 금리인상이 초래한 금융시장 충격을 기억하는 버냉키의 시장 길들이기가 출구전략의 연착륙을 이끌지, 신흥국 외환위기의 망령을 불러낼지는 두고볼 일이다.
천예선 기자/cheon@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