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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세피난처의 유령들…
1차·2차·3차·4차…ICIJ 잇단 명단공개 연루 인사 사퇴·부인·해명 끝모를 파문…역외탈세 의혹 지구촌 고위층의 추한 자화상
이수영 OCI 회장 부부(5월 22일 1차), 최은영 한진해운홀딩스 회장(27일 2차), 연극인 윤석화 부부(30일 3차), 전두환 전 대통령 장남 전재국(6월 3일 4차)까지….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의 조세피난처 연루 인사 명단 공개가 회를 거듭하면서 국내 지도층의 역외 탈세 파문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다.

해외에서는 탈세 의혹이 불거지면서 오스트리아 3대 은행의 최고경영자(CEO)는 사퇴했고, 벨기에 다이아몬드 가공업체 이사도 경영진에서 물러났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서 고위 각료, 유력 금융가문과 대부호, 아트 컬렉터서 영화배우까지 지구촌 고위층의 추한 자화상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한국은 물론 미국ㆍ영국ㆍ호주 등 수사당국은 역외 탈세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강도 높은 수사를 벌이고 있다.

국경을 넘어 탈세를 발본색원하는 작업에 국가 간 공조도 더욱 치밀해지고 있다.

 
차례대로 드니스 리치 (미국), 폴 호간 (호주), 이미 마르코스 (필리핀), 故 군터 삭스 (독일), 일함 알리예프 대통령 (아제르바이잔), 헤르베르트 슈테픽 (오스트리아), 카르멘 티센 보르네미사 (스페인), 토니 머천트 (캐나다), 포자만 나폼베지라 (태국), 故 바론 엘리드 로스차일드 (프랑스), 장 자크 오지에 (프랑스)

▶역외탈세 연루 정ㆍ재계 거물=조세피난처의 온상인 유럽은 이번 ICIJ 명단 공개에서 집중포화를 맞았다.

프랑스에서는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의 ‘절친’이자 대선캠프의 자금 총책이었던 장 자크 오지에가 지목됐다. 그는 케이만군도의 한 유한회사에 주주와 이사로 등재돼 있다. 케이만군도는 인구 5만의 남태평양 작은 섬이지만 세계 5대 금융중심지로 대표적 조세피난처다.

1950~60년대를 풍미한 독일의 대표적 플레이보이 사진작가 군터 삭스는 역외회사 설립을 위해 개인 비서까지 뒀다. 그는 개인 비서에 쿡아일랜드를 여행한 후 두 개의 유령회사를 설립하도록 지시했다. 유럽 금융재벌 가문인 로스차일드도 탈세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프랑스 지부의 후계인 바론 엘리 드 로스차일드는 1996~2003년 쿡아일랜드에 20개의 신탁회사와 10개의 지주회사를 설립해 남태평양에 새로운 금융왕국을 세웠다.

이탈리아에서는 전직 텔레콤이탈리아 정보보안 책임자이자 현직 해커가 거론됐다. 파비오 지오니는 버진아일랜드 소재 투자회사의 소유주로 지목되자 “버진아일랜드? 거기가 어딘지도 모른다”며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오스트리아의 라이파이젠인터내셔널은행(RBI)의 헤르베르트 슈테픽 최고경영자(CEO)는 조세피난처의 유령회사를 통해 탈세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결국 사임했다.

이 밖에도 스페인의 가장 부유한 예술품 수집가이자 철강회사 티센그룹 소유주의 아내이기도 한 카르멘 티센 보르네미사는 역외 유령회사를 통해 그림을 사들였다. 영국의 여성 갑부 사라 페트리 미어스는 카리브해 지역에 무려 1200개 이상의 유령회사를 운영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아시아에서는 정치 패밀리가 대거 이름을 올렸다.

태국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전 부인 포자만 나폼베지라, 마하티르 모하맛 전 말레이시아 총리의 아들 미르잔 빈 마하티르, 필리핀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장녀인 이미 마르코스 일로코스노르테 주시사 등이 해외로 재산을 빼돌린 혐의를 받고 있다.

호주 출신 월드스타 폴 호간은 영화 ‘크로커다일 던디’ 시리즈로 벌어들인 수익을 해외 비밀계좌에 숨겼다.

대통령 일가가 페이퍼컴퍼니(서류상 회사)에 연루된 나라도 있다. 일함 알리예프 아제르바이잔 대통령과 그의 부인 그리고 두 딸은 버진아일랜드에 로사문트인터내셔널 유한회사의 이사로 등재돼 있다.

대서양 건너 캐나다에서는 유력 변호사가 덜미를 잡혔다. 토니 머천트는 남태평양 작은 섬 쿡아일랜드에 신탁회사를 설립했다. 그의 아내인 자유당 소속 상원의원 파나 머천트도 이 회사의 수혜자로 등재돼 있어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탈세 혐의로 스위스로 도망간 금융가 마크 리치의 전 아내이자 유명 작사가인 드니스 리치, 멕시코에서는 석유화학ㆍ푸드ㆍ통신 등 재벌기업인 Alfa 가문의 디오니시오 가르차 메디나가 거론됐다. 


▶글로벌 금융기관 직접 알선=정재계 거물의 재산 은닉 배후에는 거대 은행의 뒷배가 있었다.

스위스은행과 도이체방크, UBS 등 세계적 메가뱅크가 세계적 거물의 유령회사 설립과 비밀계좌 개설을 적극 도왔다.

크레디트스위스의 자회사인 클라리덴은행은 주로 중국과 대만ㆍ말레이시아ㆍ필리핀ㆍ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부호를 상대로 원스톱 조세피난 서비스를 제공해온 ‘포트큘리스 트러스트넷’와 접촉해 역외탈세에 관한 민감한 사안에 대해 논의하고 기꺼이 유령회사 설립을 도왔다. 도이체방크 역시 포트큘리스 트러스트넷의 싱가포르 사무실과 연계해 고객이 역외에 300개의 유령회사와 신탁회사를 설립하는 것을 지원했다.

또 영국의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 미국의 딜로이트, 네덜란드의 KPMG 등 세계 3대 국제회계감사 및 컨설팅 업체도 아시아 거물과 기업의 유령회사 설립에 자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천예선 기자/cheon@heraldcorp.com


☞ICIJ 어떻게 조사했나=ICIJ가 세계 정ㆍ재계 거물의 역외 금융거래를 조사하게 된 계기는 260기가바이트의 대용량 컴퓨터 하드디스크 하나가 배달되면서부터다. 이 하드디스크에는 170여개국의 금융거래 정보가 담긴 250만개의 파일과 200만건의 e-메일 기록이 저장돼 있었다. 여기에는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와 쿡아일랜드 등 조세피난처에 세워진 12만2000개의 역외회사, 1만2000명의 중개업자 그리고 13만명의 고객 명단이 포함됐다. ICIJ는 46개국 출신의 탐사보도 저널리스트 86명과 함께 하드디스크의 정보를 분류ㆍ분석, 순차적으로 역외회사와 연관된 세계 인사의 명단을 공개하고 있다. 지난 3일 한국 연루 인사의 4차 명단을 공개한 ICIJ는 언론 역사상 최대 규모의 역외 공동 탐사보도가 될 것이라고 자평했다.


☞조세피난처란=법인의 실제 발생소득의 전부 또는 상당 부분에 대해 조세를 부과하지 않는 국가나 지역을 말한다. 중남미와 카리브해 연안에 집중돼 있으며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케이만군도, 쿡아일랜드, 버뮤다 등이 대표적 조세피난처로 꼽힌다. 이 밖에도 유럽의 스위스, 리히텐슈타인, 룩셈부르크, 아일랜드 등도 저과세 조세피난처로 알려져 있다. 국제구호단체 옥스팜이 지난달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전 세계 부자가 조세피난처에 은닉한 자산은 최소 18조5000억달러(약 2경866조원)에 이른 것으로 추산됐다. 이로 인한 세금 손실액은 1560억달러(약 176조원)에 달한다. 옥스팜은 전 세계 순금융자산 94조7000억달러 가운데 19.5%가 조세피난처에 있다고 추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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