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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 광장 - 함영훈> 우리를 떠나는 한국사, 찾아오는 숭례문
역사이해는 나라의 지속가능성
안중근의사도 모르는 요즘 세태
국보1호 숭례문 복원과 더불어
뒤로 밀려난 역사교육도 복원되길



당신은 숭례문을 사랑하시나요? 왜? 국보1호이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그 숭례문을 당신은 얼마나 아시나요?

숭례문이 불 탄 지 5년. 5월 4일 복원공사 준공식을 맞는다. 1907년 헐려나간 주변 성곽 중 동쪽으로 53m, 서쪽으로 16m를 되살렸다. 석재 원형을 가장 많이 닮았다는 경기도 포천의 화강석과 강원도 삼척의 왕족묘 주변 금강송을 쓰고, 용마루 길이를 원형대로 바로잡았으며, 필체의 주인공인 양녕대군 탁본으로 현판을 되살렸다고 한다.

그럴듯하게 복원했고, 준공행사도 성대히 치른다고는 하지만 요즘 우리 문화와 역사에 대한 광범위한 ‘불감증’ 때문에 일말의 공허함을 지울 수가 없다. ‘복원?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건데…’라고 누군가 지껄이는 듯한 느낌도 든다. 급기야 이 공허함은 애정결핍증의 철없는 연인처럼, 숭례문 같은 우리 문화재, 장구한 우리 역사에 대한 국민의 ‘사랑’을 확인하고픈 조바심으로 이어진다. 애정 없는 만남은 불행이다.

숭례문은 도성의 정문이자 수호신이다. 때론 숱한 총칼을 온몸으로 떠안으며 왜적의 군화에 짓밟히거나 제 살이 잘려도 굳건히 버티고, 때론 백성의 어려움을 보살피거나 영세상인의 보금자리를 열어준, 굳은 살의 아버지 같은 존재다.

숭례문의 ‘예(禮)’는 오행상 불(火)인데, 멀리 마주보는 관악산의 불 기운을 이열치열(以熱治熱)로 막아 경복궁의 안위를 지킨다는 뜻이다. 가뭄과 흉년을 막기 위한 기우제와 기청제를 지낸 곳이고, 국가정책을 처음으로 공개하거나 공론에 부치는 정치1번지였으며, 흉악범의 목을 걸어 법 집행의 엄정함을 보여주는 장소이기도 했다.

조선 건국 직후 축조된 숭례문 주변 성곽은 통한의 을사늑약이 체결된 지 2년 뒤 일본 왕세자 요시히토(嘉仁)의 조선 방문 직전 헐렸다. 일제는 접촉사고 우려 때문이라고 했지만, 요시히토가 조선 도성의 좁은 문을 통해 들어오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일제는 한민족정기의 상징으로 여겨 1924년 ‘고적급 유물 등록대장 초록’에 포함시키지도 않았던 숭례문을 1934년 보물 지정 땐 1호에 숭례문을 올렸다. 임진왜란 때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통과했던 문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확인했던 것이다. 이는 광복 후 한국 정부에도 이어져 국보1호가 된다.

임진왜란이 나기 보름 전 숭례문에 작은 불이 났고, 한일 강제병합 직전 현판이 바닥에 떨어졌으며, 한국전쟁 며칠 전 성곽 일부가 붕괴되는 등 고난의 역사 때 늘 신호를 보냈다는 설도 있다.

숭례문을 향한 정서는 고금(古今)이 같을 수는 없겠지만, 그 혼과 정신을 후세가 공감해야 함은 마땅하다. 역사와 문화를 안다는 것은 ‘지속가능성’ 같은 것이다.

일제 욱일승천기 모양의 홍보디자인을 제작한 철없는 대학생들, 야스쿠니신사를 젠틀맨으로 이해하는 중고생들, 서대문형무소가 뭔지, 안중근 의사가 누군지 모르는 청소년들의 역사인식 빵점 소식이 연일 화제의 뉴스가 되는 요즘이다.

전체 공교육 과정 중 역사수업 비중은 독일의 4분의 1, 프랑스의 3분의 1, 중국ㆍ일본의 절반 수준인 5.3%에 불과하다. 주변국의 ‘역사 침공’에 대책없이 말만 앞세우는 우리의 위정자들이다.

2004학년도까지 필수과목이었던 한국사가 선택과목으로 바뀐 2005학년도에 27.7%만이 택하는 데 그치더니 이후 선택률은 18.3, 12.9, 10.8, 10.8, 11.3, 9.9%로 계속 낮아진 데 이어 2012학년도엔 6.9%로 곤두박질했다.

국민이 역사를 모르는 문화유산은 영혼없는 껍데기일 뿐이다. 나라 혼의 영속성을 위해 국사의 수능 필수과목화를 늦춰서는 안된다. ‘껍데기 나라’ 국민이 외침(外侵) 때 총 잡을 마음이 나겠는가. ‘나라 발전의 근원인 애국은 역사 읽기부터 시작된다’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뜻을 되새겨보는 숭례문 복원식이 되길 기대한다. 

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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