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천예선 기자] 글로벌 금융시장에 일본발 환율전쟁 전운이 감돌고 있다. 일본은행이 15년간 지속된 디플레이션(지속적 물가하락) 탈출을 위해 지난 4일 대대적 ‘양적ㆍ질적 완화 정책’을 발표하면서 3년 전 환율전쟁이 재연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일본은 2010년 9월 엔고 저지를 위해 시장에 직접 개입, 2조엔 규모 엔화를 풀면서 글로벌 환율전쟁을 촉발시킨 전례가 있다.
아베노믹스(아베 총리의 경기부양 정책)의 최전선에 있는 구로다 야스히로 일본은행 총재는 대표적인 ‘통화 마피아’로 통한다. 자국의 통화문제뿐 아니라 통화외교를 통해 세계 경제에 영향을 준다는 의미다.
시장 충격파는 이미 확산되고 있다. 8일 오전 한때 엔화는 달러당 98엔 후반대까지 치솟았다. 엔달러 환율이 98엔대로 진입한 것은 3년 10개월만이다. 이같은 추세라면 100엔 돌파도 시간 문제라는 주장이 나온다.
하지만 일본은행의 파격 행보에 대해 국내외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일본내에서는 노다 요시히코 전 일본 총리가 “아베노믹스는 자산거품 경제”라며 강력히 비판했고, ‘투자의 귀재’ 조지 소로스는 “일본은행이 일으킨 엔화 약세는 눈사태가 되어 멈출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며 이는 “위험한 정책이다. 일본인의 해외 자본 도피가 시작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엔저 가속, 100엔 돌파할까=구로다 총재의 공격적인 통화정책으로 엔저가 가속화하면서 달러당 100엔을 넘는 2차 엔저시대를 열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실제로 금융위기 이후 70엔대까지 떨어졌던 엔달러환율은 지난해 11월 자민당이 정권을 잡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해지면서 11월 말 82엔대, 12월 말 86엔대, 1월 말 92엔대, 3월말 95엔대를 돌파한데 이어 4월8일 장중 98.70엔까지 급등하고 있다.
시장에서는 상반기중 엔달러 환율이 110엔대까지 치솟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안전자산으로서 엔화가치가 하락하고, 양적완화 규모면에서도 미국에 크게 앞서기 때문이다. 미국의 양적완화 규모는 국내총생산(GDP)대비 0.5%인 반면 일본은 1.5%에 달한다. 소로스는 지난주 CNBC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의 환율통제권 상실을 우려하면서 “미국과 같은 규모의 양적완화를 국내총생산(GDP)이 미국의 3분의 1인 일본이 시행하면 그 영향력은 3 배에 달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엔 캐리 트레이드(국가간 금리차 이용한 투자) 부활도 추가 엔저를 부채질할 수 있다. 아베 정권의 금융완화정책은 조달통화로서 엔화의 매력을 높이고 있다.
‘채권왕’ 빌 그로스 핌코 공동 최고투자책임자(CIO)는 최근 “세계적으로 연쇄적인 자금의 이동이 발생할 것”이라면서 “일본은행의 통화정책은 와타나베 부인(일본의 개인투자자)이 미국 국채에 투자하도록 자극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일본 정부는 자국 경제 펀더멘털를 감안할 때 달러당 100엔대 환율이 적정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이에 따라 아베 정권의 엔저 유도정책은 장기화할 것으로 보인다. 시장에서는 적어도 7월 29일 참의원 선거까지는 엔화 약세가 지속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엔화가 95엔대 내외에서 완만한 상승세를 유지할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아베노믹스의 양적완화 기대감은 이미 시장에 반영됐고, 미일간 금리차도 향후 급격하기 보다는 완만하게 진행될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국내외 비판 쇄도=일본은행의 ‘양ㆍ질 완화’에 대해 일본 내외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노다 요시히코 전 총리는 지난 7일 치바현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해 “아베노믹스와 관련해 해외 투자자들과 식사할 기회가 있었다”며 “이들 중 한명이 ‘ABE’는 A=asset(자산), B=bubble(거품), E=economy(경제)’라는 의미라고 말했다”며 아베 총리의 이름을 빗대어 “아베정책이 자산거품을 일으킬 것”이라고 비난했다.
국제사회도 일본의 인위적 환율조작을 좌시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6일 “일본이 2년간 270조엔까지 통화량을 확대하면 자본의 해외 유출로 인해 세계에 과잉 유동성이 확산할 위험이 있다”면서 “엔화가 100엔대에 진입하면 국제사회는 ‘오프사이드(반칙)‘로 인식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세계 최대 채권펀드 핌코의 그로스 CIO는 “일본은행이 물가를 2% 올리려면 엔화의 가치가 더 떨어져야 한다“며 ”그러나 주요 7개국(G7)이 이같은 상황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엔저가 계속되면 달러와 유로 강세를 부추겨 미국과 유럽을 경기 침체 국면에 빠뜨릴 수 있다. 또 아시아 국가는 미국의 양적 완화로 달러대비 자국 통화 절상에 직면한 상황에서 엔저까지 겹쳐 수출이 큰 타격을 받고 과잉 유동성 유입으로 금융시장이 혼란에 빠지는 상황을 우려하고 있다.
중국은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냈다. 중국 국부펀드 중국투자공사(CIC)의 2인자인 가오시칭 사장은 “일본의 환가치 약세 유도는 다른 나라 돈으로 자국 수출을 끌어올리겠다는 뜻“이라며 ”이웃 나라를 쓰레기통(garbage bin) 취급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천예선 기자/cheon@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