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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실의 금지된 사랑…해피엔딩.
스캔들로 바람잘날 없는 세계의 왕족들… ‘불편한’ 사랑으로 시작했지만 끝내 ‘불멸의’ 사랑으로 승화
스웨덴 릴리언 왕자비
평민·이혼녀 출신…33년만에 결혼 인정
“내인생은 한마디로 사랑밖에 난 모른다”

찰스 왕세자의 첫사랑
폴로경기서 커밀라 파커볼스에 첫눈에 반해
한때 불륜 비난…35년만에 ‘세기의 재혼’

에드워드 8세의 순애보
미국인 이혼녀 심슨과 결혼위해 왕관 포기
‘eternity’ 새긴 까르띠에반지 선물 일화유명



대대로 각국의 왕실은 왕족들의 스캔들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왕실의 결혼은 정치적인 포석이 깔려 있는 결합일 뿐이었다. 재물과 권력을 맞바꾸며 이뤄진 왕족들의 정략 결혼은 비극적인 결말을 맞기 십상이었다. 혼외정사와 파경, 근친상간, 비극적인 죽음이 늘 꼬리표처럼 왕실을 따라다니는 이유이기도 하다. 왕가의 금지된 사랑은 때로는 세인의 지탄을 받기도 했고, 때로는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왕실의 숨겨진 여인=지난 3월 10일(현지시간) 스웨덴 스톡홀름의 대저택. 백발의 한 여인이 쓸쓸하게 숨을 거뒀다. 그녀는 스웨덴 왕가가 끝까지 비밀로 묻어두고 싶어했던 여인이었다. 평민 출신이자 이혼녀였던 릴리언 왕자비는 스웨덴 베르틸 왕자와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기까지 33년을 기다려야 했던 금지된 사랑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영국 웨일스 출신의 릴리언은 1943년 런던에서 베르틸 왕자를 만났다. 당시 릴리언은 영국인 배우 이반 크레이그와 결혼한 상태였다. 전쟁이 발발하자 크레이그는 군대에 징집됐고, 릴리언은 런던에 머물면서 병원에서 부상병을 돌보는 일을 했다. 베르틸 왕자는 당시 해군 연락관으로 영국 주재 스웨덴 대사관에 머물고 있었다. 두 사람은 클럽에서 처음 만난 이후 친분을 쌓다가 사랑이 싹텄다. 
 
Bertil & Lilian

릴리언은 2년 뒤인 1945년, 역시 다른 여성과 교제하던 크레이그와 어렵지 않게 이혼했다. 하지만 이들의 연인 관계는 스웨덴 베르나도트 왕가에 골칫거리였다. 엄격한 귀천상혼제를 적용하고 있는 스웨덴 왕가는 왕자들이 평민과 결혼하면 왕위 계승권과 왕자 칭호를 박탈한다. 베르틸은 형이 비행기 사고로 숨져 왕이 될 수도 있었으나, 완고한 아버지는 평민과 결혼한 아들의 왕위 계승권과 왕자 칭호를 빼앗았다. 결국 이들은 동거 상태로 프랑스와 스톡홀름을 오가며 조용하게 살았다.

평생에 걸쳐 서로에게 헌신한 이들의 사랑은 스웨덴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995년 80세가 된 릴리언은 “내 인생을 한마디로 종합한다면 사랑밖에 난 모른다”면서 부군인 베르틸 왕자의 사랑을 칭송하기도 했다.

두 사람이 왕실의 결혼 승인을 받은 것은 33년 뒤인 1976년이었다. 당시 베르틸은 64세, 릴리안은 61세 때였다. 릴리언과의 로맨스로 스웨덴에서 ‘프린스 차밍’으로 불리며 인기를 누린 베르틸 왕자는 1997년 85세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이후 알츠하이머병에 시달린 릴리언도 향년 98세로 남편의 뒤를 따랐다.

▶35년 만에 이룬 첫사랑=한때 불륜관계로 비난받았던 찰스 영국 왕세자와 커밀라 파커볼스. 이들의 35년간 사랑은 결국 합법적인 결혼으로 귀결됐다. 두 사람의 사랑은 세기의 로맨스와 집요한 불륜 사이에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이들의 인연은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두 사람은 폴로경기에서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지만 결혼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각자 이혼과 결혼을 거치면서 먼 길을 돌았다. 이들은 지난 2005년 합법적으로 인생의 동반자가 됐다. 다이애나 전 왕세자비가 프랑스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숨진 지 꼭 8년 만이었다.

결혼식은 초라했다. 35년 만에 이룬 첫사랑이었지만 재혼식은 20여분 만에 끝났다. 28명의 지인만 참석한 결혼식은 둘의 신원을 확인한 뒤 결혼 의사를 묻고 성혼 선언을 하는 형식으로 짧게 끝났다.

이들은 교회에서 종교의식을 갖춘 정통 왕실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다. 왕위를 계승하면 영국 성공회의 수장이 될 찰스 왕세자지만, 전 남편이 살아 있는 이혼녀와 불륜 끝에 결혼하는 것에 대한 비난 여론 때문이었다.

 
Charles & Camilla

이 결혼으로 평민이던 파커 볼스는 ‘콘월 공작부인’이란 공식 직함을 받았다. 왕실 서열도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다음으로 높다. 그러나 파커 볼스는 따가운 여론을 의식해 왕세자비의 공식 직함인 ‘웨일스 왕세자비’를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찰스 왕세자가 왕이 된 후에도 왕비가 아니라 ‘프린세스 오브 콘소트(왕의 배우자)’란 호칭을 사용하겠다고 거듭 약속했다.

35년 만에 결실을 맺은 왕실 결혼에 대해 영국인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일부 시민은 소박한 파커 볼스가 찰스 왕세자를 내조하면서 행복한 여생을 보낼 것이라며 기대했다. 반면 다이애나비를 잊지 못하는 시민들은 불륜을 저지른 이혼녀가 왕실에 들어서는 것을 용인할 수 없다며 비난하기도 했다.

▶왕좌 버리고 택한 사랑=불륜으로 얼룩진 영국 왕실에도 순애보는 있었다. 미국인 이혼녀 월리스 심슨과 결혼하기 위해 왕관을 포기한 에드워드 8세가 그 주인공이다. 남편의 왕위를 포기하게 만든 심슨은 빼어나게 아름답지도, 젊지도 않았다. 두 차례 이혼경험이 있었던 심슨은 왕세자 에드워드의 정부였다. 문제는 왕세자가 1936년 1월 에드워드 8세로 즉위한 후 그녀와 결혼을 원하면서 일어났다. 헨리 8세의 전례 덕분에 왕이 이혼녀와 결혼하는 것은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국가와 왕실의 위신에 큰 타격을 주는 일이었다. 전통을 중시하는 영국민에게 이혼녀인 심슨 부인은 왕비로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이었다. 결국 사랑을 선택한 에드워드 8세는 즉위 10개월 만에 퇴위했고 다음해 파리에서 심슨 부인과 결혼했다. 결혼식 당시 에드워드 8세가 심슨 부인에게 영원한 사랑을 뜻하는 ‘eternity’라고 새겨진 까르띠에(Cartier) 반지를 선물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때부터 결혼을 앞둔 젊은이들에게 까르띠에는 결혼서약의 한 상징물이 됐다.

 
Simpson & Edward Ⅷ

사랑을 위해 왕위를 던진 세기의 로맨스는 당시에는 엄청나게 손가락질을 받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에드워드 8세가 세상을 뜰 때까지 금슬 좋은 부부로 살면서 자신들의 사랑에 충실한 삶을 누렸다.

권도경 기자/ko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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