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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광장 - 민병문> 3 · 1절에 다시 생각하는, 미묘한 애국심
일자리 창출, 양극화 축소에
야당 인사도 과감히 등용하는
탕평책과 소통, 복지 확대로
사랑하고 싶은 애국심 유발을





북핵 위협과 새 정부 탄생 등 세월이 하수상하니 자연스레 애국, 애족을 말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국가적 위기를 애국심으로 넘겨보자는 속셈일 터다. 새마을운동, 금모으기운동 등은 대표적 한민족의 애국심 사례로 꼽히지만 그 단어 자체가 생성된 지 얼마 되지 않는다. 조선조 때만 해도 ‘애민’‘애군’사상 등은 유교적 영향으로 쓰였어도 애국이란 말은 찾기 힘들다.

애국심이란 말이 본격적 사용된 것은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과 더불어서라는 게 정설로 보인다. 안중근ㆍ윤봉길 의사의 쾌거에다 1919년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벌어진 독립선언서 발표 사건은 애국심의 단적인 예다. 손병희ㆍ오세창 등 천도교인 15명, 기독교인 16명, 불교인 2명 등 모두 33명이 서명한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자 전국은 일제 10년 치하를 규탄하고 국권을 회복하자는 궐기대회로 들끓었다.

이때 전국에서 200여만명이 참가했고 공식 집계로만 7500명이 피살되었으며, 1만6000명 부상에 4만6000명이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다. 방년 나이 17세의 유관순 열사가 당시 이화여고 재학 중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일경에 의해 죽음을 당한 것도 그때 일이다. 그야말로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맨 주먹의 민간인이 총구 앞에 과감히 나섰던 것이다. 태극기와 종교의 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ㆍ1운동의 의미는 지향하는 바 목표가 뚜렷해 더욱 빛난다.

다시 말해 이 운동은 단순한 궐기대회를 넘어 조선 독립과 군주제 복원이 아닌, 공화제 정부의 시초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그때까지 무정부 상태였던 조선이 상해 임시정부의 기반을 만들었고 무장 투쟁의 빌미를 다졌으며, 노동자와 농민의 의식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또 간디가 주창했던 비폭력 저항운동보다 한 달 앞서 맨 주먹 시위를 함으로써 뒷날 일제의 한반도 문민화 정책의 단초를 제공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애국심의 정의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예컨대 이등박문하면 우리에게는 불구대천지 원수이되, 일본인에게는 조선과 만주를 집어삼켜 일본제국의 위용을 떨친 대영웅이자 애국자인 것이다. 반대로 안중근 의사는 일본인에게 암살자일 뿐이지 우리처럼 성스러운 애국자가 아니다.

고전적 서양 애국심(patriotism)의 대상은 조상의 땅이나 고향 등 지리적ㆍ자연적 개념에서 출발하다가 마키아벨리와 루소 등에 의해 정치적 공동체가 기반하고 있는 공동적 가치, 그러니까 헌법이나 법률 등 정치체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발전된다. 영토적 개념을 넘어 미국처럼 다민족 국가에 꼭 필요한 정의다. 미국이 펄럭이는 성조기에 대해 집착하는 이유다. 그러니까 애국심은 애국하고 싶은 대상, 국가 또는 이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정부가 잘해야 빛을 낸다. 수백만 인민을 기아선상에 몰아넣고 핵개발에 목매는 북한에 대한 애국심은 맹목적이다.

임진왜란 때 12전12승의 해전 승리 결과 서해와 남해를 제압, 왜군이 더이상 북상과 장기전을 못하게 한 이순신이란 희대의 조선 애국자 장군을 모함으로 사형시키려 한 조선조 임금과 그 일당을 위해 애국하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할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도 마찬가지다. 68년 시작되었던 ‘국민교육헌장’과 ‘국기에 대한 맹세’는 유신체재 잔재로 비판받다 전자는 94년 폐지되고 후자는 2007년 몇몇 자구를 수정해 아직 시행하고 있지만, 당시 한국 실정으로선 애국심을 고양시켜 경제발전을 추구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박근혜 정부 각료는 첫 단추인 총리 제청부터 청문회에 걸려 신음했다. 밀실 인선에 소통 부재 결과다. 이런 정부에 애국심을 권장해서 얼마나 먹힐지 애국심의 날 3ㆍ1절을 맞은 소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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