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학습효과로 채권시장 육성
10조弗 규모…10년새 5배 급성장
정부 부채급증 부추겨 되레 毒
대부분 장기채 발행에 어려움
성장세 브라질·中 등에 국한
FT “급성장 불구 불안요인 여전”
신흥국들이 1990년대 외환위기 이후 앞다퉈 자국 채권시장을 키웠지만, 여전히 불안요인은 도사리고 있다고 31일(현지시간)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보도했다.
FT는 이날 ‘대속의 길’이란 제목의 전면 분석기사를 통해 지난 98년 러시아 외환위기를 상기시키면서, 지난 20여년간 경제적 부실과 만성적인 불안의 대명사로 통했던 신흥시장이 변하며 과거 위기 때 신흥국 경제를 침몰시킨 취약한 환율과 높은 인플레이션, 부채 부담, 무역 불균형, 재정적자 등을 해결해나가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긍정적인 변화로 자국 채권시장의 급성장세를 지목했다.
FT에 따르면 전체 신흥국들의 자국 채권시장은 2011년 하반기 기준 약 10조달러 규모로, 최근 10년새 5배 가량 커졌다. 이는 전 세계 채권시장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수준으로 추정된다. FT의 표현을 옮기자면, 가히 혁명적인 성장세다.
뱅크오브아메리카-메릴린치의 집계에 따르면, 멕시코의 페소화 채권시장이 1996년의 280억달러에서 2011년 하반기 4450억달러 규모로 성장했고, 한국의 채권시장도 이 기간 1조1000억달러 규모로 5배나 몸집을 불렸다.
신흥국들이 자국 채권시장의 육성에 적극 나선 것은 지난 위기의 학습효과다. 세계적 경제석학인 배리 아이켄그린과 리카도 하우스만 교수는 신흥국들은 자국 통화로 해외에서 돈을 빌리기 어려운 ‘원죄’ 탓에 외화 부채를 늘리서 환율 및 금리 정책의 혼란을 야기했고, 이것이 1980~1990년대 외환위기의 근본원인이라고 지적했다.
필리핀 세사 푸리시마 재무장관은 지난해 FT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아시아 금융위기 때 이웃국들이 입은 타격과 국제통화기금(IMF)의 가혹한 처사를 보면서 교훈을 얻었다”고 밝혔다. 국제신용평가사들도 채무구조의 변화를 신흥국들에 대한 신용등급 상향 사유 중 하나로 꼽았다.
그럼에도 신흥시장에 대한 우려는 말끔히 가시지 않고 있다. 우선 자국 채권시장의 성장세가 정부 부채의 급증을 부추기고 있다는 지적이다. 또한 외화 유입이 필요한 경상수지 적자국에는 되레 독이 될 수 있고, 몇몇 국가를 제외하면 여전히 만기 10년 이상의 장기채 매각에 어려움을 겪는 점, 그리고 자국 채권시장의 성장세가 브라질ㆍ중국ㆍ한국 등 일부 국가에 국한된 점 등을 FT는 불안요인으로 꼽았다. 심지어 잠비아ㆍ몽골 등의 국가들은 여전히 달러 부채에 과도하게 의존하며 추세에 역행하고 있다.
여기에 최근 몇 년 새 신흥 시장에서 달러표시 회사채 발행이 기록적으로 활발했던 점도 시장에선 우려하는 부분이다. 하우스만 교수는 “달러 부채의 극적인 감축에도 신흥국의 자국 채권시장에 대한 해외 투자자들의 참여는 제한적인 상황”이라며 “이 때문에 신흥국들은 원죄의 ‘대속’이 아닌 ‘금욕’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영화 기자/bettykim@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