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비밀계좌 명성 흔들=스위스에는 UBS와 크레디트스위스, 율리우스바에르 등 320개 은행이 영업중으로, 총 역외 예금 규모는 2조 달러를 웃도는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의 스위스 금융을 키운 주역은 지난 1934년 마련된 은행 비밀 보장법이었다. 나치의 유대인 재산 추적에 맞서기 위해 계좌 비밀 보장과 함께 이를 위반시 형사 처벌을 명문화한 것. 하지만 탐욕스런 탈세 행렬이 줄을 이으면서 스위스는 ‘검은 돈의 천국’이란 오명을 쓰게 된다. 급기야 2004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스위스를 조세 회피 방지에 비협조적인 ‘회색국가군’으로 분류했다.
국제적인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스위스 정부는 2005년 유럽연합(EU)과 탈세방지 협약을 체결하는 등 변신을 꾀하게 된다. 스위스의 은행 비밀주의 전통에 결정적으로 금이 간 건 미 금융위기 때다. 2009년 4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담에서 조세 회피지역에 대한 규제 강화를 합의한 후 각국 정부는 스위스 등에 대한 정보 공개를 압박해왔다. 막대한 재정적자에 허덕이던 미 정부는 스위스 등 해외 은행에 거액을 맡긴 미국인에 대한 세무 조사를 벌여 조세 회피를 도운 혐의로 스위스 최대은행 UBS에 벌금 7억8000만달러를 매겼다. 또 스위스 비밀계좌를 가진 미국인 4450명의 명단을 넘겨받았다. 당시 스위스의 에벌린 위드머-쉬럼프 법무장관은 “은행들이 고객의 범죄행위까지 보호할 의무는 없다”고 설명했다. 사실상 스스로 비밀 보장 원칙을 포기한 셈이다.
극심한 재정난을 겪는 각국 정부가 당장 세수 증대를 위해 ‘탈세와의 전쟁’을 강화하고 있어 스위스 비밀 계좌의 명성은 더욱 타격을 입을 전망이다. 지난해 출범한 프랑스의 사회당 정부는 공정과세를 내걸고 부유세 도입 및 탈세 혐의자에 대한 사법 처리 방침을 밝히기도 했다.
미국은 2013년부터 외국 금융기관도 미국인이 보유한 계좌 정보를 미 국세청에 직접 통보하도록 하는 ‘해외 금융기관 계좌신고제(FATCA)’도 시행할 계획이다. 이를 어기면 해당 금융기관이 미국에서 올리는 금융 수익의 30%를 벌금으로 내야 한다. 독일도 최근 기존 독일인 소유의 스위스 은행 비밀 계좌 자산에 21~41%의 세금을 부과하는 대가로 비밀 계좌를 유지하는 협정을 맺었다. 또 신규 비밀 계좌에 대해선 이자 소득의 26.8%를 물리기로 했다.
유럽연합(EU)은 다국적 기업의 역외 탈세에 대한 공동 대응을 강구중이다. 특히 구글과 스타벅스, 아마존 등 미국 기업이 유럽에서 엄청난 이익을 올리면서도 수익을 세금이 낮은 지역의 법인에 몰아주는 방식으로 탈세한다고 보고 있다. EU는 조세회피지역과 기존에 체결한 ‘이중과세 방지협정’을 폐기해 지나치게 낮은 세금을 낸 기업에는 이중 과세하는 방안도 검토중이다.
▶스위스 은행, 중동ㆍ아시아에 사활=스위스에 대한 규제 수위가 높아지자 재산을 숨기고 세금을 회피하려는 기업들과 부호들의 발길도 주춤해지고 있다. 더이상 비자금을 만들기 어려워지자 은행을 떠나 지하 벙커로 돈을 옮기는 기업들도 생겨났다. 이에 UBS 크레디트스위스 등 글로벌 금융사들은 고객 이탈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다. 특히 미개척 시장인 중동은 물론 아시아의 부자 고객을 겨냥한 프라이빗뱅킹(PB) 사업에 공을 들이고 있다. 율리우스바에르 등 스위스의 자산관리 특화 은행들도 아시아에서 몸집 키우기에 나섰다. 율리우스바에르는 싱가포르에 아시아 PB 본사를 내고 있다. 윤치원 UBS 아시아ㆍ태평양 회장은 “싱가포르, 홍콩은 공용화 수준의 영어와 신뢰받는 법률, 예측 가능한 정책을 무기로 외국인 인재 유치전을 펴고 있다”면서 “UBS는 자산관리 비즈니스에 진출할 때 손익분기점까지 7~10년을 내다보며 장기 투자에 나서고 있다”고 밝혔다.
김영화 기자/bettykim@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