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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 칼럼 - 전창협> 광화(光化)를 거닐다

서민들의 퍽퍽한 삶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양극화 못지않게 무너지는 중산층 문제는 생각보다 가팔라 보인다. 광화(光化)란 이름처럼 앞으로 5년간 우리 국민 모두에게 빛이 널리 퍼졌으면 …



공(公)이 노량 앞바다에서 세상 마지막 전쟁을 치르기 한 해 전인 정유년(1597년). 그해 난중일기, 장군의 필체가 흔들리고 있다. 4월 초하루 일기는 “맑다. 옥문을 나왔다”로 시작한다. “지금 비록 그(이순신)의 손으로 적장의 목을 베어 오더라도 결코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다”는 선조의 노한 목소리가 나온 게 1월. 옥문을 나서 백의종군이 시작된  4월 첫날. 몇 사람의 위로와 술로 하루를 보낸다. 4월 13일 “달려나가 가슴을 치고 슬퍼하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해 보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10월 14일 “뼈와 살이 떨리고 정신이 아찔하고 어지러웠다” ‘통곡’이란 두 글자가 쓰인 편지를 받는다. 막내아들 면의 전사소식.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 빛이 변했구나”.

광화문 광장 초입, 충무공 동상은 무인(武人)처럼 단호하다. 일기엔 견인(堅忍)의 모습이 많지만 나약한 한 인간의 모습도 적잖다. 충무공이 빛난 곳은 명량이나 노량에 있지만 인간이기에  빛은 더욱 깊어진다.

충무공 뒤에 온화한 세종대왕상이 있다. 극작가 신봉승 씨가 ‘세종,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다’란 책을 통해 조선시대 인물로 21세기 한국 드림정부를 구성했다. 27명의 임금과 참판(차관급) 이상 수만명 후보 중 대통령은 세종대왕이 꼽혔다. 태종 뒤를 이어 임금에 오른 세종의 나이는 스물 둘. 왕에 오르자 ‘7년 대한(大旱)’이란 얘기가 나올 정도로 가물었다. 굶주린 시체가 거리에 즐비했다. 젊은 세종은 광화문 네거리인 6조 관아에 가마솥을 걸고 임금이 먹을 식량으로 죽을 쑤게 했다. 즉위 7년(1425년) 7월 1일 실록. “벼농사 형편을 나가 보리라”며 세종은 우산과 부채(扇)를 쓰지 않고 서문 밖을 나섰다. “오늘 보니 눈물이 날 지경이다”. 벼가 잘 되지 못한 곳을 보면, 반드시 말을 멈추고 농부에게 까닭을 물었다. 점심을 들지 않고 돌아왔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과 같이 우러러 보는 것이다”.

세종대왕 뒤로 광화문이 보인다. 광화문의 원래 이름은 ‘정문(正門)’이었다. 이름을 붙인 사람은 조선의 설계자인 정도전. “이 문을 닫아서 이상한 말과 기이하고 사특한 백성을 끊고, 이 문을 열어서 사방의 어진 이를 오도록 하는 것이 정(正)의 큰 것이다”라는 해석이 붙여졌다. 광화문이란 이름으로 불린 것은 세종 때. 유래에 대해선 여러 해석이 있지만 “광피사표 화급만방(光被四表 化及萬方ㆍ빛이 사방을 덮고, 교화가 만방에 미친다는)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다.

광화문 너머 청와대. 지금 청와대 주인은 임기 말 사면논란에 휩싸여 있다. 이유야 어쨌든 불통의 상징인 ‘명박산성’이 광화문 사거리에 세워졌던 것에 대해 충무공과 세종은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박근혜 당선인이 지난달 사실상 당선이 확정되고 곧바로 광화문을 찾았다. 세종 때와 같은 가뭄은 아니지만 서민들의 퍽퍽한 삶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양극화 못지않게 무너지는 중산층 문제는 생각보다 가팔라 보인다. 서민이나 중산층엔 ‘21세기 가뭄’이다.

광화(光化)란 이름처럼 앞으로 5년간 우리 국민 모두에게 빛이 널리 퍼졌으면 하는 기대를 광화 속을 거닐며 생각해 본다.
 

jljj@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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