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이목이 집중돼온 디자인 특허전쟁이 싱겁게 끝났다. 삼성과 애플 간 팽팽한 대립을 점쳤던 세계의 예상과 달리 애플은 완승을 거뒀다. 승리 배경에는 ‘트레이드 드레스(trade dress)’가 있다. 전통적인 지적재산권으로 분류하기 어려운 신지적재산권의 하나인 트레이드 드레스는 쉽게 말해 다른 제품과 구별되는 외향과 느낌을 뜻한다. 일반적인 특허와는 달리 해당 상품이 가진 전반적인 이미지를 인지하는 감각ㆍ감성 등 객관적으로 측정하기 힘든 비기능적 요소까지도 법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개념이다.
지식창조 산업의 중요성은 그간 꾸준히 강조돼 왔다. 하지만 이번 소송처럼 우리에게 창의성과 디자인의 중요성을 환기시키고 경각심을 일깨운 사례는 흔치 않았다. 바야흐로 비기능적ㆍ감성적 가치까지 지적재산권의 권리로 인정하는 시대가 열렸다. 즉, 시장의 판도와 룰이 바뀌었다는 뜻이다.
이런 판도에 휘둘리지 않고 능동적으로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는 소비자들이 ‘OOO 스타일’이라고 직관적으로 인지하는 느낌까지 상품에 녹여내고 이를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직관적 느낌을 가장 강력히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바로 상품의 디자인이며, 이 디자인을 통해 전달되는 상품 고유의 정체성이다.
사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디자인은 제품 개발과정에서 부가적인 절차로 여겨져 기술적 개발이 완료된 후 디자인이 기술에 맞추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제 디자인은 기술 중심의 한계를 극복하고, 기술과 감성의 융합시대를 주도하는 혁신수단으로 진화했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디자인에 대해 본격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여 년 전이다. IMF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기업 체질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디자인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경쟁적으로 기업 내에 디자인연구소를 만들고, 디자이너를 대거 채용하는 한편 디자이너를 임원으로 발탁해 위상을 높여줬다. 그 결과 IF, 레드닷 공모전 등 세계 주요 디자인상을 휩쓸었다. 가전, IT기기, 자동차 등 수출 주력제품의 세계 시장 점유율이 획기적으로 높아졌다. 최근 10년간 디자인 투자가 300억원에서 2200억원으로 600% 이상 증가한 기업도 있다.
반면, 국가적 차원의 디자인 투자는 민간 투자규모의 10년 전 수준에 머물러 있다. 우리나라 디자인 R&D예산은 320억원으로 정부의 전체 R&D예산 16조2000억원의 0.2%로 극히 미미한 수준이다. 지난 10년간 국가 R&D예산이 300% 이상 증가한 것에 비해 디자인에 대한 투자는 50% 증가에 그쳤다.
최근 무서운 기세로 디자인에 투자하고 있는 중국을 보자. 2011년 베이징시 디자인 예산은 5억위안(900억원)이었다. 우리나라 국가 디자인 R&D 예산의 3배에 가까운 규모를 시(市)디자인 예산에 투자하고 있다.
선진국이 이뤄놓은 것을 빠르게 따라잡는 추격자 전략으로는 더 이상 우리의 미래를 담보할 수 없는 경계선에 서 있다. 세계시장에서 첨단 분야를 제외하면 다른 분야에서 기술 격차는 거의 없어진 것과 다름없다. 제품의 차별화는 디자인이 주도한다. 디자인이 창의적 혁신의 핵심, 글로벌 경쟁력의 원천이 된다는 말이다.
혁신적 디자인을 통해 중진국 함정에서 벗어나 선진경제로 올라서는 대도약을 이뤄야 한다. 이러한 대도약을 하기 위해서는 국가적 차원의 디자인 지원이 절실하다. 디자인산업 발전을 주요 국가적 아젠다로 삼아 거시적 관점에서 종합적이고 일관된 정책을 수립하고 지원해야 한다. 또한 이를 위해 ‘국가디자인위원회(가칭)’와 같은 범정부적 차원의 기구를 설립해 민간과 정부가 지혜를 모아 디자인 강국으로서 K-DESIGN(디자인 한류)을 이뤄낼 수 있는 중장기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투자 대비 높은 효과를 창출하는 디자인 R&D에 대한 지원과 투자에 발 벗고 나설 때다.
<이태용 한국디자인진흥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