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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멍’ 때리며…빛의 파동을 느끼다
현대미술 중에는 꽃그림이며 풍경화도 있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추상회화도 많다. 김태호와 최선명은 후자에 속한다. 두 작가는 화폭에 아크릴물감을 수십, 수백번씩 겹쳐올리며 풍경을 그리고, 빛을 그린다. 그런데 결과물은 심심한 단색조 화폭이다. ‘무슨 풍경인데 이렇게 난해한 걸까?’ 탄식이 절로 나온다. 그런데 작가의 설명을 듣고 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여러 빛깔의 물감을 무수히 바르고, 또 바르면 이처럼 투명한 그림이 나온다는 것. 그림은 보는 사람의 위치와 주변 사물, 조명에 따라 색깔이 미묘하게 변한다. 더 흥미로운 것은 두 작가 작업의 개념이 정반대라는 점. ‘관조 vs 분석’ ‘명상 vs 과학’으로 갈린다.

▶물이 찰랑찰랑? 아니 검은 유리잖아? 김태호의 관조적 작업= 오는 6월 3일까지 서울 사간동 금호미술관에서 ‘Scape Drawing’전을 여는 김태호(59·서울여대 교수) 작가의 전시장을 찾으면 잠시 착각을 하게 된다. 너른 미술관 바닥에 물이 찰랑찰랑 고인 듯해 발을 살짝 담가 보지만, 웬걸 까만 유리다. 김 교수는 미술관 3층 바닥에 검은 유리를 깔고, 나무데크(deck)를 설치했다. 유리에는 벽에 걸린 그림, 관객의 몸이 비쳐지며 연못 같은 착시효과를 준다. 작가는 미술관 곳곳에 크고 작은 단색조 회화들도 내걸었다. 아무런 형태도 없지만 “나무, 강, 바람을 얇은 물감으로 그린 것”이라고 했다.

이번 작업은 북에 고향을 두고온 실향민들이 한뼘이라도 더 고향 가까이 가고 싶어 파주 법흥리에 조성한 묘역이 단초가 됐다.

온갖 풍경과 생각을 품었으나 마침내 ‘무(無)’가 된 풍경을 접하는 관객들이 세상사 시름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했으면 좋겠다는 게 작가의 바람이다. “전시부제를 ‘멍 때림’으로 하려했다”는 그는 학고재갤러리 본관(6월 10일까지)에도 드로잉·회화 20여점을 내걸었다. (02)720-5114 


▶과학으로 빛을 그리는 최선명의 분석적 작업= 15일부터 7월 1일까지 서울 통의동 갤러리시몬에서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Evidence of the Invisible)’전을 여는 재미(在美) 작가 최선명의 작업은 ‘빛의 파동’에서 비롯됐다. 그는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가 아침, 점심, 저녁 빛의 각도와 세기에 따라 달라지는 풍경을 여러 개의 화폭에 담았던 것에 주목했다. 최선명은 “모네 시절 풍경이 그런 방식이었다면 현대 테크놀로지에선 그 변화하는 풍경을 하나에 담을 수 있지 않겠느냐”며 “색이 내는 파장을 고려해가며 일일이 단계별로 그렸더니 이런 화폭이 나왔다”고 했다.

최선명은 1층에 영상작품을 설치했다. 올 초 인스부르크 동계유스올림픽에서 상영됐던 작업으로, 높다란 바벨탑이 한순간에 무너지며 라틴어·히브리어·영어·아랍어 글자를 흩뿌리는 작품이다. 이 역시 수학적 계산을 하느라 3, 4년이 소요됐는데, 오늘날 세계는 여러 언어로 갈라졌지만 신의 눈엔 ‘찰나의 한 순간’이지 않겠느냐는 개념이 담겨 있다. 시간과 공간의 동시성 개념을 천착해온 작가답게, 최초의 분열에서 최후의 통합을 읽어낸 셈이다. (02)720-3031

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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