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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수에서 공예가로.."오색의 구슬 꿰며 나만의..."
{헤럴드경제=이영란 기자} 중년에 접어든 이들에겐 은퇴 후 ‘인생 2막’을 무얼 하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가 가장 큰 고민이다. 숨가쁜 일상을 보내느라 이렇다 하게 준비한 게 없는데 은퇴시기는 째깍째깍 다가와 막막해 하는 이들이 많다. 

국민대에서 사회학을 가르치던 김인숙 교수는 인생 2막을 ‘예술’과 함께 하고 있다. 오색의 구슬을 꿰어 독특한 장신구를 만들며 삼매경에 빠져 있는 것. 김 교수는 퇴임 전부터 틈틈이 준비한 덕에 자신만의 ‘꽉 찬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의 육성을 들어보자. 

▶범죄사회학자가 영롱한 장신구를?=김인숙(73) 국민대 명예교수는 범죄사회학을 전공한 사회학자다. 국민대 사회학과에서 후학을 양성하던 그는 지난 2002년부터 ‘인생 2막’을 장신구 디자이너로 보내고 있다. 김 교수는 해마다 봄이면 ‘구슬정원’이라는 이름으로, 영롱하면서도 대담한 장신구를 선보이는 작품전을 연다. 올해도 어김없이 서울 장충동 서울클럽에서 개인전을 가진 그는 “어느새 내 개인전이 9회에 접어들어 스스로도 놀랐다”며 “강단에 서던 때와는 또 다른 즐거움에 시간가는 줄 모른다”고 했다.

쌍용그룹을 창업한 고(故) 김성곤 회장의 큰 딸로, 남편(前 나라기획 조해형 회장)과의 사이에 2남1녀를 둔 김 교수가 퇴임 후의 삶을 미리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은 주위 사람들 때문이었다. 그는 “은퇴한 교수들이 마땅한 일을 못 찾아 방황하는 걸 많이 봤다. 그래서 미리미리 방도를 찾았다”고 했다. 때문에 2002년 퇴임과 함께 곧바로 장신구 디자인을 시작할 수 있었다.


김 교수는 어린 시절부터 영롱한 유리공예를 무척 좋아했다. 외국을 다녀온 아버지는 희귀한 유리공예품을 딸에게 안기곤 했다. 어른이 돼 더욱 유리에 빠져든 그는 대학원(미국 뉴욕대)시절에는 틈날 때마다 뉴욕의 앤티크 갤러리와 벼룩시장을 찾았다. 그러면서 점차 세월의 더께가 스민 낡은 구슬과 옥, 진주, 밀화(송진이 굳은 것), 산호 등에 마음이 끌렸다. 이후 교수시절에는 영국, 프랑스며 인도, 태국, 미얀마의 벼룩시장과 앤티크 페어를 부지런히 누볐다. 인도는 열 번도 더 갔다.

그렇게 모은 구슬과 희귀한 돌(준보석류)을 알알이 엮거나 이어붙이며 김 교수는 목걸이도 만들고, 브로치며 귀고리도 만든다. 철사며 철판을 수시로 구부리고 연결하느라 그의 손은 ‘사모님 손’과는 거리가 멀다. “좁쌀보다 작은 구슬을 일일이 이어붙이다가 밤을 꼴딱 샌 적도 부기지수”라는 그는 “고된 작업이지만 온전히 나만의 내밀한 순간이라 이를 즐긴다”고 했다. 게다가 지구상 어디에도 없는 ‘김인숙표 장신구’를 만드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의 장신구는 대담하다. 남들은 ’보석’이라 부르며 값을 자꾸 높이려들지만 애써 ‘구슬’로 낮춰(?)부르며 보다 많은 이들과 친근하게 소통하길 즐긴다. 다이아몬드 같은 고가의 보석 대신 낡은 청동구슬, 양식진주, 옥, 밀화를 즐겨 쓴다. 오래 된 골동품과 자연석에서 우러나오는 여유로움에, 그만의 독자적인 조형감각을 더하는 걸 즐기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공예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그의 디자인은 공예가 못지않게 독보적이다. 10m 전방에서도 ‘김인숙 디자인’임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과감한 게 특징이다. 기왕에 장신구를 착용한다면 올망졸망한 것보다는 하나를 달더라도 대담하게, 개성있게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때문에 그가 만든 브로치를 달고 모임에 나가면 “어디서 그런 멋진 장신구를 구했느냐”는 질문을 수없이 받게 된다. 


그는 디자인을 할 때 동서양 미감이 공존하도록 한다. 동양 소재에 서양 오브제나 돌들을 곁들이며 서로 어우러지게 하는 것. 또 보다 많은 이들이 그의 장신구를 즐길 수 있도록 진귀한 원자재값에 비해 가격을 낮게 책정하고 있다. 그에겐 외국인 팬도 많다. 한국과 인연을 맺은 해외 정ㆍ관계 유명인사와 그들의 부인들이 그의 팬이다. 외국 전시 제의도 줄을 잇는다.

서울 이태원 자택의 좁은 방에 작업대를 들여놓고 장신구를 만드는 그는, 아버지(김성곤 회장)에 대해 묻자 “통도 크시고, 사업감각도 남다르셨다. 아, 그리고 무엇보다 진짜 남자셨다”고 회고했다.
이어 앞으로 최소 10년은 더 작업을 하고 싶지만 중국인들이 옥이며 산호 같은 원자재를 싹쓸이해 문제라면서도 밝은 모습이다. “재료가 없으면 없는 대로, 또 다른 길을 찾으면 되지 않겠느냐”면서.

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 
사진=김명섭 기자/msiro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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