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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이지않는 것,감춰둔 이야기 담아낸 유현경의 인물화
<이영란 기자의 아트& 아트>

그림 속 인물은 깊은 생각에 빠져 있다. 흰옷에, 금발과 흑발이 기이하게 겹쳐진 여성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 중이다. 작가 유현경의 인물화 ‘생각’이다. 작가는 동독의 작은 마을에서 미호라는 여성을 만나 그를 그렸다. 그러나 ‘미호를 그린 것 같지 않다’는 생각에 곧 지워버렸다. 이번엔 요한나가 작가의 방에 들어왔다. 요한나의 얼굴에 매혹된 작가는 재빨리 옮겨 그렸다. 하지만 수행자처럼 고요히 생각에 잠긴 그림 속 인물은 작가 자신이기도 하다. 결국 작품엔 세 명의 인물이 그려졌지만 동시에 그 누구의 초상도 아니게 됐다. 그의 그림은 이렇듯 수수께끼 같다.

화가 유현경(You Hyeonkyeongㆍ28)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린다. 사람의 마음, 감춰둔 이야기, 말할 수 없는 것들을 화폭에 담는다. 그가 서울 소격동 학고재갤러리(대표 우찬규) 본관과 신관에서 오는 28일부터 대규모 개인전을 갖는다. 이번 전시에는 작년 10월부터 5개월간 옛 동독지역인 플뤼쇼브의 레지던시(작가 체류)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그린 인물화와 풍경화 등 총 100점이 나왔다. 그로선 벌써 다섯 번째 개인전이지만 학고재가 20대 작가의 개인전을 여는 건 그가 처음이다.



전시 타이틀은 ‘유현경-거짓말을 하고 있어’로 정해졌다. 왜 거짓말일까? 작가는 ‘머리가 인식하는 것보다 더 빨리 손으로 그려내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결과는 늘 그렇지 않기에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했다. 결국 진실에 이르고 싶으나 늘 그렇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회의이자 질타인 것이다.

유현경은 직관으로 그림을 그린다. 엄청난 에너지로 인간의 초상과 누드, 또는 성행위를 하는 남녀를 그려온 그는 요즘엔 초상화 작업에 몰두해 있다. 인물만큼 그를 미혹시키는 게 없기 때문이다. 지난 가을과 겨울, 독일 플뤼쇼브의 250년 된 고성(古城)에서도 마을 주민과 외국에서 온 동료작가를 모델로 초상화를 그렸다. 


그의 인물화는 지금껏 우리가 보아온 인물화와는 사뭇 다르다. 대단히 파격적이고 모호하다. 얼굴들이 거의 뭉개져 언제나 알쏭달쏭하다. ‘실체는 간데없고 유령 같다’는 반응도 적지않다. 이는 사람들의 내면을 관찰해, 그들의 삶을 투영시키려하기 때문이다. 인물의 외형을 그리지만 그 사람에게서 보이지 않는 추상적 개념과 아우라를 그리는 것. 평소 자신이 동경했던 태도, 이를 테면 의연함과 차분함을 읽어냈을 때 그는 그 정서를 그린다. 결국 ‘심리적 이상’을 표현하는 셈이다. 



작가는 지난 2008년 ‘100인의 초상화’ 작업을 시행했다. 100명의 모델을 1명당 1~2시간에 사실적으로 그린 것. 그러나 독일에서는 인물의 내면을 주로 그렸다. 신작들은 인물의 윤곽과 형태는 거의 생략된 채 인상과 태도, 분위기가 표현됐다. 


유현경은 ‘...’(유화 70×50㎝. 2011)라는 초상화에 대해 “나는 이 그림을 좋아한다. 그녀가 만지작거리고 있는 손의 망설임이 좋고, 옷의 고요함이 좋다. 고요해 보이지만, 망설이고 있다”고 했다. 제목의 말줄임표처럼 모델의 얼굴은 회색 붓질로 뭉개졌지만 만지작거리는 손은 또렷이 드러나 있다. 설렘이 느껴진다.


이제 막 학업(서울대미대, 대학원)을 마친 새내기인 유현경은 요즘들어 국내외에서 빠르게 주목받고 있다. 해마다 작가들은 무수히 늘어도 뚝심있게 좋은 그림, 독창적인 그림을 그리는 작가는 외려 줄어드는 상황에서 그의 작업은 새로운 인물회화, 인간 삶과 그 내면을 압축한 그림이란 점에서 돋보인다.
인간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대상을 그리지만 유현경의 그림은 추상적이고 독특하다. 대상이 주체와 중첩된 그의 그림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인간 삶의 불가사해한 부분을 압축해낸다. 비가시적인 것들이 모습을 드러냈다가 조용히 침잠하는 그림, 유현경의 작업이 국내외에서 각광받는 이유이다. 전시는 4월 29일까지. (02)720-1524. 사진제공=학고재

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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