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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휴먼다큐> 숭례문 ‘기와 장인’ 한형준 제와장
얼마전 숭례문 복구현장에서 상량식이 열렸다. 목조 건물의 대들보 역할을 하는 큰 나무에 공정 과정을 담은 상량문을 넣어 봉하고, 그 상량대를 지붕 아래까지 들어올리는 작업이다. 이는 엄숙한 전통의례로 치러지는데, 목조건축에서 상량식을 거행하면 공사는 마무리 단계로 접어든다. 이후 작업은 매우 빠르게 진행되는데, 숭례문 복원이 막바지에 이른 셈이다. 이제 중심은 기와를 얹히는 일로 넘어간다.

숭례문 지붕에 올릴 기와는 무형문화재 제91호인 한형준(83) 제와장의 지휘 아래 충남 부여에 위치한 한국전통문화학교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숭례문에는 2만 2000여장의 기와가 필요한데, 불량공정에 대비해 2만 6000여장을 구워낼 계획이다. 현재 총 소요량의 50%가 준비됐다.

숭례문 무사 복원 염원을 담아 화려하게 치러진 상량식과는 별도로, 한 제와장은 29일 부여 가마터에서 소박한 제사를 지낼 예정이다. 그리고 흑룡의 기운이 가장 세어진다고 하는 4월 1일에 맞춰 가마의 불을 최고로 높인다. 제와 공정 중 가장 중요한 ‘막음불’ 단계다. 전수조교인 김창대 씨 등 함께 작업하는 몇 명만이 참여할 이 의식을 위해 목욕 재계까지 한다고 하니, 숭례문 복원작업에 임하는 그의 경건함과 절실함이 느껴진다.

하얀 한복에 지팡이. 그래서 최신 유행 디자인의 안경테가 더 눈에 띄는 한 제와장을 최근 부여 한국전통문화학교에서 만났다.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가마 위에 정한수 한 그릇을 떠 놓고 불을 지키고 있었다. 



# “나라 운이 좋은가, 숭례문 기와가 아주 잘 나왔어.”

“나라가 잘 되려나벼. 기와가 아주 잘 나오고 있어. 옛날부터 사가는 사람 운수가 좋아야 한다고 혔어. 나라 보물 지붕에 쓸 기와잖아. 나라 운이 좋으니 제와가 잘 된겨. 허허.”

제 아무리 실력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기와가 제대로 구워지지 않는다고 한다. 첫째는 기와를 가져갈 사람이 지닌 운이고, 다음은 직접 만드는 사람, 거기에 기와 공장 주인까지 세 사람의 운이 잘 맞아떨어져야 가장 좋은 기와가 나온다는 것. 60년 흙을 만지고 불을 보아온 무형문화재 한 제와장이 지금도 가마 앞에서 겸손할 수 있는 이유다.

“예전에 잘 구워달라며 웃돈까지 준 사람이 있었어. 온갖 정성을 다 들였는데, 세 번이나 실패했제. 굴 단속을 열심히 해도 허사고…. 하도 이상혀서 다른 사람 기와랑 같이 넣었는데, 이 사람 기와만 또 실패했어. 그게 다 그 사람 운수여.”

온도, 습도, 불의 세기 등 과학적인 측정이 어려웠던 과거엔 타버리거나 깨지는 기와가 많았을 터. 실패할 확률이 높다보니 생겨난 말이다. 옛날에야 통할 법한 논리지만 한 제와장의 손을 보면 빈말이 아닌 듯 싶다. 여기저기 꿰맨 자국이다. 흙, 물, 불과 함께한 평생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한 제와장의 말을 따른다면, 그 ‘운’이 원인이든 결과든 올해 대한민국은 운이 좋은 편이다. 지난 2월 부여 한국전통문화학교에서 진행한 올 첫 소성(불에 기와를 구워내는 일)에 한 제와장은 매우 만족한다.

“날씨가 무지 추웠는데, 괜찮여. 겨울은 원래 제와가 쉽지 않제. 그런 것치곤 아주 잘 나왔어. 그래서 운이라는겨.”

기와 소성은 계절에 따라서 보통 2~3주가 걸린다. 흙을 다져서 기와 형태를 만드는 데 일주일이 걸리고, 그것을 건조시켜 형태를 바로잡는 데 또 일주일이 걸린다. 다음이 가장 중요한 단계인데, 불을 때고 식히는 데 마지막 일주일을 보낸다.

“불을 때기 시작해서 사나흘이 되면 ‘막음불’을 하지. 불 온도를 가장 높이 올리고 가마 입구를 막는 거야. 이게 가장 어려워. 불 색깔을 볼 줄 알아야 해. 그래서 ‘불을 본다’고 하지.”

제와를 배우기 시작해서 불을 ‘보는’ 데까지는 보통 수년이 걸린다. 김 전수조교는 물론 한 제와장도 혼자 불을 때고, 보는 데 10년이 넘게 걸렸다. 그야말로 ‘눈대중’으로 불을 조절해야 한다. 제와 기술의 핵심이다. 



# “열한살 때 ‘밥이나 얻어 먹자’는 심정으로 기와일 시작했제.”

“열한살 때인가가, 이모부 따라 전남 보성에서 잔심부름 하면서 기와일을 배우기 시작했지. 밥은 못 얻어 묵을까 싶어 따라갔제.”

외가에서 자란 한 제와장은 1940년부터 이모부를 따라 처음 흙일을 거들었다. 하지만 품삯은 먹고 자고 추석에 집에 갈 차비 정도. 당시 나주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한 제와장의 부모는 보다못해 3년 만에 그를 다시 집으로 오게 했다.

“계속 농사를 지을까 싶었는데, 그 해 여름에 이모부가 쌀 5되를 하루 삯으로 주겠다 해서 다시 기와일을 시작했지. 그리고 전남 장흥 안양제와공장에서 40년 넘게 일하면서 평생 흙일을 한 게지. 농사고 뭐고 다른 건 할 줄도 몰라.”

당시 이모부 고 최길수 씨는 인근에서 이름난 기와장이었다. 한 제와장이 보유하고 있는 조선 기와의 전통 제작기법과 공정은 모두 이모부로부터 배운 것이다.

“광복 후에는 제법 돈좀 벌었지. 이때는 품삯이 높았어. 한 해 번 돈으로 논 서너마지기는 샀으니껜. 근데 기와장이는 돈을 많이 벌어도 술값 등으로 탕진하는 경우가 허다했어.”

한 제와장은 번 돈을 고스란히 고향의 부모님께 보냈는데, 아버지는 자식이 고생해서 번 돈이라며 기둥 밑에 숨겨두곤 했다. 거기엔 어릴 때부터 한 제와장을 괴롭히던 노름꾼 형 탓도 있었다.

“형 빚도 갚아 주고, 형수 보약도 지어드렸지. 나중엔 부모님이 모두 아프셔서 거기에 다 썼어. 아버지 돌아가시곤 외삼촌들께 보내드렸는데, 외삼촌도 병이 드셔서 돈이 모일 틈이 없었제.”

한국전쟁 통에 이모부가 고향에 간 사이, 한 제와장은 스스로 기와를 굴에 재이고 불을 때 기와를 구워내야 했다. 돌아온 이모부가 그 모습을 보고, ‘불 보는 법’을 가르쳤다. 흙일을 시작한 지 10년이 넘어서 한 제와장은 진짜 ‘기와장이’가 됐다.

“혼자서도 어디 가서 밥 안 굶게 된 거제. 그러고 나니까 여기저기서 중매말이 오갔어. 한국전쟁이 끝나고 제와공장 주인 조카랑 결혼까지 하게 됐어.” 



# “손가락질 받던 ‘기와장이’가 어느날 문화재가 됐다는 기라.”

결혼을 하고는 공장일이 꽤 잘됐다. 한때는 빚을 얻어서 밭 아홉마지기를 샀다. 그런데 시멘트 기와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밭을 팔 정도로 상황이 나빠졌다.

“새마을운동 시작 전엔 솔직히 살만 했지. 조선 기와를 똑같이 흉내낸 기계 기와가 생기면서 보수 일감이 확 줄었어. 그러다 80년대에는 일반주택용 기와까지 싼값에 나왔으니, 전통 기와가 설 곳이 없어졌지.”

특히 1970년대 경주 보문단지 건설 때 전통 기와에 대한 불신이 퍼졌다. 갑자기 늘어난 수요에 급하게 만들어진 수제 기와가 대량으로 동파된 것. 그때부터 문화재 보수공사든, 일반 주택공사든 거의 대부분의 기와를 공장기와가 대신하게 됐다.

“그 후로 기와로는 밥 못 먹고 살지. 보수용 기와를 일년에 200~300장 만드는 게 다야. 팔아서 담뱃값, 술값은 돼. 밥은? 조그맣게 농사 지어서 먹고 살제. 똑같이 흙 만지는 일인데, 농사일은 영 서툴러 못 하겄더라고. 허허.”

기계를 들여 기와를 구워낼 수도 있었지만, 한 제와장은 전통 재래기법을 고수했다. 올림픽이 있던 1988년 8월 1일 중요무형문화재 91호로 지정 받았다.

“한때는 대통령보다 월급이 더 많았제. 헌데, ‘불 맞은 돈으론 부자 못 된다’더니 참말이야. 또 일년 열두달 흙하고만 사니 사람꼴이 말이 아니지. 그래서 옛날에 ‘기와쟁이’ 지나간다며 손가락질 했어. 천한 일 중에 천한 일로 여겼지. 그런데 어느날 나더러 문화재라 하더라고.”

평생을 일해온 안양제와공장 주인이 별세하고, 지금은 한 제와장이 어엿한 공장장이 됐다. 하지만 주인 아들 소유인 건물에 매년 세를 내고 있다. 숭례문 복원작업에 참여하는 최고의 장인으로 꽤나 주목받았지만, 얼마전까지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에 살았다.

“괜찮여. 막내딸이 융자받아서 좋은 집 하나 지어줬지. ‘흙일하는 사람은 아들이 귀하다’더니, 내가 딸만 여섯이야. 서울, 부산, 김해 다 뿔뿔이 흩어져 사는데 오늘도 전화왔어. 손주들도 지 할애비가 숭례문 기와 만드는 사람인 걸 다들 알고 아주 좋아해.” 



# “매끈한 기계 기와가 좋아 보이제? 기와는 손으로 만들어야지”

숭례문이 화재로 소실된 것은 온 국민의 슬픔이었지만, 이를 통해 국내 문화유산의 보존ㆍ복원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특히 재래 기법과 그 기능을 보유하고 있는 장인이 주목받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국보 1호인 숭례문 복원사업이다보니, 현존하는 전통방식에 대한 조사도 어느 때보다 철저해야 했다.

“예전에 텔레비전에 나와서 전통 방법으로 뭐 한다 떠들어대던데, 다 엉터리야. 우리 제자만도 못헙디다. 아, 그 사람들 흉보는 게 아니라 진짜 그래. 조선시대 제와 기술은 여기밖에 없어.”

현재 창덕궁과 지방 사찰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전통기와가 남아 있는 곳이 거의 없다. 경복궁 역시 기계 기와를 사용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70년대 후반 이후 모든 문화재 복원공사에는 전부 KS규격의 기계 기와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기계로 만든 기와가 번들번들하고 때깔이 고우니 좋아 보이제. 크기도 딱딱 맞아떨어져서 이기 쉬우니 다들 기계 제와를 쓰지. 그래도 볼품없어도 손으로 제대로 만들면 훨씬 더 오래가고 튼튼해.”

하지만 아무리 전통 기와가 품질이 우수하고 만드는 사람이 있어도 실제로 사용하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사람들은 빠르고 저렴한 기계 기와를 찾는다. 만약 숭례문 복구작업이 아니었다면, 한 제와장도, 조선 기와 제작방법도 그대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한 제와장에게 전통 방식의 가마터를 제공하고 있는 김봉건 한국전통문화학교 총장은 “숭례문 보수공사가 끝나도 궁과 능 등 기존 문화재 기와 복구작업까지 전통 기와 공급이 확장됐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부여에 위치한 이 학교에 문화재청이 가마터를 마련한 것은 이 지역에서 질 좋은 흙을 공급할 수 있고, 학교 설립 목적에 알맞게 학생의 실습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형태는 숭례문 축조 당시 기와를 생산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남양주 토평리에서 발굴된 가마 모양을 따랐다고 한다.



# “난 괜찮여, 제자들 건강하고 돈 잘 벌었으면 좋겠어”

한 제와장은 기계 기와가 기와 시장을 점령한 후 1년에 200~300장의 전통 기와를 구워냈다. 제와작업을 하며 담배를 즐겨 태우는데, 이렇게 해서 번 돈은 고스란히 담뱃값으로 충당된다.

“난 뭐 그래도 괜찮여. 내 밑에서 고생한 우리 애기들좀 잘 됐으면 좋겠어. 난 뭐 자세한 건 몰라. 그런데 문화재청도 솔직히 마음에 안들어. 나이 오십 넘은 사람들 보유자 만들지 말고, 20~30대 애들 키워야 연구도 하고 기술도 발전할 거 아니여.”

곁에 있던 문화재청 직원이 당황해서 “그게 법”이라고 하자 “아, 법 갖고 이야기 하지 말어”하며 목소리를 더 높였다.

“젊은 사람들이 해야 발전해. 나이 상관없이 능력있으면 진급도 하고, 나랏일도 하는 거 아녀? 지금 밖에서 일하는 애들좀 봐. 얼마나 기특하고 이뻐. 너무 고맙지.”

오랫동안 문화재 보수공사에는 기계 기와가 쓰여왔다. 하지만 숭례문 복원사업을 통해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덕에 전통 기와의 수요를 늘리는 방안이 강구되고 있다.

한 제와장과 김 전수조교, 그리고 전통문화학교 학생이 중심이 된 전통 기와 생산은 숭례문 복원에 그치지 않을 예정이다. 문화재청의 ‘전통 기와 및 전돌 생산 활성화 방안’을 따라 곧 문화재 보수공사에 전통 기와가 쓰이게 된다.

최근 숭례문 상량식 현장에서 한 번 더 만난 김 전수조교는 “숭례문 이후 몇몇 작업이 이미 구두로 약속돼 있다”고 말했다.

일본도 범룡사 금당 화재 후 문화유산 관련 법과 제도 등이 다시 정비된 바 있다.

김봉건 전통문화학교 총장은 “그동안 행정ㆍ학문적으로 간과했던 부분이 새롭게 조명받고 인식되고 있다. 숭례문 복원을 통해 전수자 양성 시스템도 함께 보완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부여 가마터에 모인 한 제와장의 제자들이 오랜 인터뷰에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내기 시작했다. 지팡이를 짚고, 연신 기침을 하며 답하는 한 제와장의 건강이 걱정 되나 보다.

“아, 내 걱정은 말어. 니들이나 잘혀. 니들 건강하고 돈 잘 벌란 말여.”

원망의 눈초리가 두려운 기자가 마지막 질문을 접으려는 찰나, 한 제와장이 제자들을 다그쳤다. 그리고 곧 “막음불은 직접 보아야 한다”며 자리를 떴다.



<박동미 기자@Michan0821>/pdm@heraldcorp.com 사진=안훈 기자/rosed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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