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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어·빛을 잃은 두 영혼…침묵으로 말하다
한강 5번째 장편소설 ‘희랍어시간’
시력 잃어가는 한 남자

말하는 것을 잃은 한 여자

사라진 고대 희랍어 매개로

서로의 아픔·희열 공유


언어가 존재하기 이전

흔적·감촉으로 이뤄진 세계

그곳으로의 초대장



노벨상 수상작가 르 클레지오로부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연약함을 증언”하는 한국의 주목할 만한 젊은 작가로 지목된 소설가 한강(41)이 굵직한 소설 한 편을 냈다. 

나를 형성하는 언어, 나를 증언하는 언어가 사라진 자리에 존재는 어떻게 드러나는지 롱 샷으로 보여주는 ‘희랍어시간’(문학동네)은 차라리 한 장의 흑백 사진처럼 읽힌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있다. 남자는 시력을 잃어가는 중이다. 그가 강의 하는 것은 고대의 죽은 말 희랍어. 강의실 한 쪽엔 온통 검은색으로 치장한 여자가 가늘게 웅크리고 앉아 있다. 바짝 여윈 여자는 남자의 눈을 바라보지만 그 너머를 응시하고 있는 것도 같다. 여자의 눈은 텅 비어 있다가 순간 무엇가를 잡아채며 순간 흔들리기도 한다. 입술을 달싹거리지만 말이 되어 나오진 않는다.

빛과 공기, 움직임이 하나로 응축되는 순간, 블랙홀처럼 빨아들여 시공을 이탈하는 결정적 순간처럼 농밀함이 한 컷 한 컷으로 진행된다.

여자는 대학과 예술고등학교에서 문학을 강의해 왔다. 그러다 ‘그것이 다시 왔다’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것은 원인도 전조도 없다.

반년 전 어머니를 여의고 수년 전 이혼, 세 차례 소송 끝에 아홉 살 난 아들의 양육권을 잃고 그 후유증으로 불면증을 앓고 있긴 하다.

여자에게 말을 못하는 건 2차적 병증이 아니다. 말 자체가 병의 실체다. 여자는 오래 전 언어로 고통을 받아왔다. 자신이 내뱉는 단어들이 스스로 꿈틀거리며 낯선 문장을 만들어내고 꼬챙이 같은 언어들이 잠을 뚫고 들어와 달군 쇠처럼 명치를 찔러대다 언어가 달아난 것이다.

열일곱 살 여자아이는 물밑에서 수면 밖을 바라보는 어른어른한 고요 속에서 두 해를 보내다 낯선 불어 단어와 만나면서 다시 입이 트인다.

20년 만에 다시 찾아온 ‘그것’은 처음 것과 다르다. 첫 번째 침묵이 출생 이전의 자궁 같은 것이었다면 다시 찾아온 침묵은 죽음 뒤의 것처럼 느껴진다.

소설가 한강이‘ 바람이 분다, 가라’(2010)에 이어 다섯 번째 장편소설‘ 희랍어 시간’을 냈다. 한강은‘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과함께 살았던 이년 가까운 시간, 소설 속 그와 그녀의 침묵과 목소리와 체온, 각별했던 그 순간들의 빛을 잊지 않고 싶다”고 밝혔다.

남자는 열다섯 살에 독일로 이민을 간다. 의사는 그가 마흔을 넘기지 못해 실명할 거라 말한다. 남자는 거기서 늘 주머니에 네거티브 필름조각을 갖고 다니며 태양에 비춰보길 좋아하는 여자를 만난다. 여자의 포즈는 그가 한국을 떠나오기 전 사찰 연등회에서 만난 먹빛 어둠을 두툼하게 밝히던 연등과 함께 강렬한 한 컷으로 남는다. 보는 것과 말하는 것이 없어진 뒤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저자는 침전돼 있는 환한 기억의 덩어리들을 하나하나 끄집어 올린다.

작가의 주인공들은 거대한 세계에 견줘 한없이 취약해 보인다. 그 세계와 연결돼 있는 언어는 생생한 칼날과 같다. 알아가는 게 연결되는 게 무섭다. 침묵은 그래서 세계에 대한 연약한 인간의 저항기제이자 견딤이다.

문학평론가 이소연 씨는 “작가는 언어가 몸을 갖추기 이전에 존재하던 것들-흔적, 이미지, 감촉, 정념으로 이뤄진 세계로 우리를 데려간다. 신생의 언어와 사멸해가는 언어가 만나 몸을 비벼대는 찰나, 우리는 아득한 기원의 세계로 돌아가 그곳에 동결해둔 인간의 아픔과 희열을 발견한다”고 평했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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