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수식하는 표현은 끝이 없다. 항상 발레계 화제의 중심이었고, 지금도 그의 이름을 빼곤 한국 발레를 말할 수 없다.
▶Prologueㆍ기적을 만드는 뜨거운 여인
“있잖아. 난 말야. 기적 같은 여자야. 내가 생각해도 참 기적 같아.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
이분. 재미있다. 발레리나의 고고한 이미지와 너무 멀다. 1분이면 홀딱 ‘깬다’. 일단 목소리 톤이 높다.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는 그에게는 마치 개그우먼의 피가 흐르는 것 같다. 처음 만나면 말 적응이 쉽지 않다. 특유의 (재일교포) 억양은 사람을 롤러코스터 태우듯 오르락내리락한다. 화려한 외모와는 달리 소탈한 동네 아줌마 같은 성격. 국립발레단 단장이 이렇게 소탈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털털하다. 덕분에 인맥은 광대하다. 인터뷰 중간중간 지나가는 사람들과 손인사하고 소리 높여 “반가워!”를 외치느라 바쁘다. 말이 빠른 만큼 정신이 분주하다. 늘 바쁘게 머릿속이 돌아가는 최태지(52) 국립발레단 단장. 그를 만나면 세상만사 즐거워진다. 우리가 잊고 살던 열정이 스멀스멀 올라와 뜨거워진다. 언어에도 온도가 있다면, 그의 언어는 펄펄 끓도록 뜨겁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는 감각적이며 감성적인 언어들. 최 단장이 가장 뜨거워지는 순간은 바로 발레를 말할 때다.
▶재일교포 출신, 국립발레단 프리마돈나 되다=1983년 5월. 당시 23세. 한국 땅을 밟은 첫날 영상은 또렷하다. 5월 특유의 쾌청한 날씨가 마음을 간질이던 날. 달랑 트렁크 하나 끌고 (당시 국립발레단이 있던) 남산자락의 국립극장을 찾았다. 초행길의 두려움을 날려버릴 정도의 서늘한 바람이 그를 맞았다. 자유롭다거나 포근하다거나 하는 느낌이 떠올랐다. ‘아… 이곳이 한국이구나. 부모님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고국이구나.’ 머릿속에 남은 한국에서의 첫 장면이다.
그렇게 영화의 한 장면처럼 한국 땅을 밟았다. 트렁크 하나 들고 가볍게 와서는, 30년을 뿌리내렸다. 이곳은 일본이 아닌 한국. 부모님이 평생을 그리워하며 노래 불렀던 고국이었다. 최태지는 이후 1983년 국립발레단 ‘세헤라자데’ 전막 주역, 1984년 ‘백조의 호수’ 등 줄줄이 프리마를 차지했다.
당시 말도 안 통하던 그의 유일한 소통구는 1대 국립발레단장인 고(故) 임성남 선생. 최 단장에겐 평생의 은인이자 지금껏 발레를 하게 된 계기를 마련해준 분이다. 선생은 가족 모두 일본에 두고, 혈혈단신 한국행을 택한 발레리나에게 고국을 대신해 무한한 애정을 심어줬다.
최태지 국립발레단장. 박해묵 기자/mook@heraldcorp.com |
“만약 임성남 선생님이 안 계셨다면, 제가 여기 있을까요? 한국말을 전혀 하지 못할 때, 선생님이 중간에서 대화를 해주셔서 가능했죠. 마치 아버지처럼 따스했어요. 당시 분위기상 일본에서 왔다는 것도 눈엣가시인데, 국립발레단에서 프리마를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살면서는 “어디서 살다 오셨어요?”라는 질문을 가장 많이 들었다. 워낙 밝은 성정을 타고났음에도, 한국말이 여전히 서툰 건 개인적인 콤플렉스다.
▶집시 같은 삶=‘한국’에서의 발레는 한국인으로서 뿌리를 찾는 과정이었다. 재일교포 출신인 그는 일본을 떠나 한국에 오기까지 경계인의 방황을 안고 살았다. 한국에 와서도 마음 편할 리 없었다. 국립발레단의 프리마돈나까지 됐으니,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감수해야 했다. 한국인으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고, 완벽한 일본인도 아니었다. 한동안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문화적인 충격을 받으면서 마냥 휘둘렸다. 이쪽 저쪽 한 곳을 정하지 못할 운명이었기에 집시처럼 떠돌았다. ‘에이, 일본으로 갈까?’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난 한국인이 되고 싶다’ ‘정체성을 가지고 싶다’는 갈망이 더 강해지는 것은 아이러니했다.
그런 그가 한국인의 정체성을 갖게 된 매개는 발레였다. 많고 많은 예술 중에, 언어가 아닌 몸으로 전하는 발레와 함께한 것은 그의 운명이었다. “늘 집시처럼 떠돌아다녔지만, 고마운 것은 발레라는 언어 없는 예술을 배웠던 거죠. 말을 하지 못해도 배울 수 있고 느낄 수 있으며, 한국말이 서툴러도 발레하기는 좋았어요. 저한테 성공했다고들 하는데, 저는 성공이 자기 나라의 정체성을 지닌 것으로 생각했어요. 그만큼 갈망이 컸죠. 제가 발레를 안 했다면, 이 아이덴티티를 느낄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정말 운명적인 선택이죠.”
▶발레, 벗어나려 해도 결국 돌아온 발레=발레라는 두 글자를 떠올리면 만감이 교차한다. 고교 시절 한 선생님은 스치듯 이렇게 말했다. “최태지, 넌 절대 발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야.” 그 말에 ‘무슨 소리? 난 어른이 돼 결혼하면 발레 절대 안 할 거야. 도망갈 거야’라며 콧방귀를 뀌었다. 이제와 돌아보면 그 선생님의 말은 소름 끼칠 정도다. 어떤 운명적인 힘이 이끌었을까. 어려서부터 벗어나려 했던 발레에서 결국 벗어나지 못했고, 결혼 후 아이 둘을 낳고도 프리마를 했다. 어디론가 도망가 있으면 누군가 손을 내밀었다. 평범한 주부로 살고 있을 때 은사 임성남 선생님이 찾아왔다. “발레하자. 무대에 서자.” 겁나서 도망갔고, 싫다고 부인해봤다. 그러다 사람이 그리워서, 나를 찾아주는 고국에 감사해서 결국 발레로 돌아왔다.
최태지의 두 번째 복귀. 국내 발레계에 유일무이한 사건이었다. 20대도 아닌 30대 중반, 아이 둘 낳은 아줌마 발레리나라니. 당시 보수적인 분위기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일부러 살찌웠어요. 아이 둘 낳고 한때 80kg까지 나갔는데 보통사람처럼 살고 싶었죠. 남편이랑 맛있는 것 마음껏 먹고 여유 있게 차도 마시고. 발레로부터 도망가려 했어요. 발레가 주는 정신적인 고통에서 벗어나자 했어요. 근데 돌이켜보면 떠나 있어도 항상 발레를 생각했어요. 말로는 가정이 중요하다면서, 마음속으로는 발레의 이상을 좇았죠. 이제 생각해보면, 운명 같아요.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굴레 같은….”
▶국립발레단 단장, 인생의 터닝포인트=최 단장이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맞은 건 19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5년 전, 불과 37세의 젊은 발레리나가 발레단 단장이 됐다. 재일교포 출신으로 공공기관장에 오른 것도 파격이었다.
“저는 원래 밤새워 고민해본 적 없어요. 언제든 잘 먹고 잘 자는 성격인데. 그땐 난생처음 한잠도 못 잤어요. 다음날 기자회견이라는데. 생각이나 했겠어요? 끔찍했죠. 퉁퉁 부은 얼굴로 기자회견에 섰는데, 그때 장면이 생생해요. 다 아버지 또래였어요. 마치 딸 다루듯. “여기 와 앉아라~” 했던 기억이 나요.”
그때부터 프리마돈나의 인생은 롤러코스터를 탔다. 순진했던 과거의 여린 얼굴. 그 시간들을 벗어나,보다 주체적으로 인생을 이끌어가야 할 결정적인 시기가 찾아왔다. 항상 원하지 않아도 어떤 길로 물꼬가 트였는데. 이번에는 기관장의 길을 걷게 됐다. 발레복과 토슈즈를 벗어던지기로 작정했다. 자리가 사람을 변화시킨다더니 급격히 말이 늘었다. 말 한마디 않던, 수줍었던 과거의 발레리나와 이별했다. 그는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고 표현한다. 과거 모습을 전혀 모르는 이들은 마냥 수줍어하던 그의 얼굴을 알 리 없다.
“말을 익히는 게 정말 스트레스였어요. 한국말도 잘 못하는데, 문화부 장관 옆에서 ‘백조의 호수’를 해설하자니 난감했죠. 재일교포 여성이 37세에 한국의 국립발레단장이 됐으니 비판도 많았고,언젠가 기관장 회의에서 기가 팍 죽어 있던 기억도 나요. 당시를 돌아보면 결국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었던 것 같아요.”
▶돈키호테형 리더=최 단장을 만나본 이들은 안다. 타고난 사업가구나. 뭔가 생각나면 추진하는 속도나 박력이 거의 돈키호테급이다. 여성스럽고 우아한 자태를 지녔으면서도 일처리 하나는 장군감이다. 국립발레단장이 된 뒤 국내 최초로 해설이 있는 발레를 시작했고, 찾아가는 발레, 전막 해설 발레를 기획했다. 러시아 안무가 유리 그리가로비치의 5대 작품을 국립발레단 정기 레퍼토리로 끌어왔다. 당시 콧대 높기로 유명한 유리 그리가로비치의 허락을 얻은 건, 최 단장 특유의 사람 잘 챙기는 성격 덕이다. 털털한 왕언니처럼 상대를 기분 좋게 만드는 재주가 기관장으로선 큰 힘을 발휘했다.
물론 시련도 있었다. 국립발레단장 임기를 마치고 2004년 정동극장장에 임명됐을 때 비판이 쏟아졌다. 어떤 사업을 하든 발레를 띄우기 위한 것으로 비쳐, 여론의 뭇매도 많이 맞았다. “임명장을 받고, 일본에 계신 엄마와 통화했던 게 생생해요. ‘엄마 감사해요. 발레라는 언어 없는 예술 덕에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찾을 수 있었는데. 이제 전통무용을 올리는 한국의 전통극장으로 가게 됐어요. 이제 진짜 한국사람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면서 기뻐했어요. 그게 엄마와 마지막 통화였죠.”
시련은 한번에 몰아서 온다고. 평생의 든든한 지원자인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발레가 내 갈 길이구나 깨달은 게 48세. 내가 손을 들어 내 길을 가야 한다는 판단으로 2007년 국립발레단장 직에 공모했고 지금의 자리에 도달했다. 2008년에 이어 2011년 연임까지. 정권이 바뀌면서도 자리를 유지한 몇 안되는 기관장이다. 자리 보전을 위한 욕심으로는 해낼 수 없는 일. 그는 이렇게 말한다. “다시 돌아와서는 도망갈 구멍이 없었죠. 내 손들어서 왔는데. 어떻게 대충 하겠어요.(웃음)”
▶섬뜩한 호랑이 선생=“이젠 되도록 연습실에 가지 않으려 해요. 가면 난리 치고 오니까. 이따위로 해? 틀린 거 안 보여? 눈물 쏙 빼게 혼내요. 내가 혼내면 괜찮은데, 남이 혼내면 싫어요. 내 새끼 키울 때랑 똑같아. 안에선 엄하게 하지만 밖에 나가면 내 새끼죠. 24명의 코르드발레도 밖에서 혼나는 건 싫어요.”
그는 발레리나, 발레리노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인간성임을 의심치 않는다. “예술 때문에 사람이 사는 게 아니고, 사람이 살기 때문에 예술이 존재한다. 사람 사는 걸 아는 사람이 예술가여야 한다”고 믿는다. 사람의 마음을 잘 알아야 훌륭한 무용수가 될 수 있다는 것.
“테크닉은 10분 보면 재미없어요. 아무리 돈을 많이 발라도 예술은 결국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에요. 한마디로 사랑이죠. 예술가는 내면의 에너지를 내놓는 이들이니, 인형이 아닌 인간이어야 되겠죠. 바비인형처럼 예쁜 게 발레리나가 아니죠. 자기가 아파보고 사랑을 해봐야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는 건데 스킬만 익히면 뭐하겠어요.”
▶epilogueㆍ양곱창과 찜질방 사이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는 그는 이제 ‘아버지와 자녀가 함께 찾는 발레’를 기획 중이다. 영화인들과 발레 작업도 올리고 싶다고 했다. 내년에는 가야금 명인 황병기 선생과 국악을 접목한 발레도 선보일 예정이다.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얘기들. 그렇게 최 단장과의 대화는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재미있는 인생사만큼 유머러스한 입담을 자랑하는 그는 여전히 혈기왕성하다.
“나는 알면 알수록 재미있는 여자야. 쉴 때는? 자신과 얘기해요. 혼자 찜질방 가서 진지하게 대화해요.”
몇 시간 동안 진지하고 열정적인 언어로 사람을 현혹시키다가도 그의 마지막 말은 결국 코미디였다.
“자기야~ 양곱창 먹으러 가자. 요 앞에 곱창 끝내주는 데 있어. 내가 쏠게. 달려달려.”
◆최태지 단장 프로필
▷출생 1959년 9월 23일(일본 교토 태생)
▷1968~1980년 일본 가이타니 발레 아카데미 입문 및 무용수
▷1987~1992년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1993~1995년 국립발레단 지도위원, 국립발레단 부설 문화학교 주임 지도강사(국립발레아카데미 시초)
▷1996~2001년 12월 국립발레단 단장 겸 예술감독
▷2000~2001년 국립발레단 부설 발레아카데미 교장
▷2001년 9월~2008년 2월 성균관대 무용학과 겸임교수
▷2004년 6월~2007년 12월 정동극장 극장장
▷2008년~현재 국립발레단 부설 발레아카데미 교장
▷2008년~2010년 국립발레단 단장 겸 예술감독
▷2011년~현재 국립발레단 단장 겸 예술감독
조민선 기자/bonjod@heraldcorp.com, 사진=박해묵 기자/mook@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