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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도 이젠 한국인”...44년만에 한국국적 되찾은 입양아 ‘얀 벵거’
수구초심(首丘初心).

하물며 여우도 죽을 때는 자기가 살던 언덕쪽을 향해 머리를 뉘우는 법이다. 온기 가득한 어머니품, 내가 태어난 땅을 떠나 이역만리 떨어진 곳에서 터를 잡고 살아가는 해외 입양인들은 오죽할까. 한 식구가 온전하게 먹고 살기 어려운 시절, 수많은 이들이 온갖 사연을 떠안은 채 형편이 우리보다 나은 국가로 입양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생이별 앞에서 눈물로 인사를 대신했던 부모의 ‘낳은 정’을 잊지 못해서인지 그들은 항상 향수에 젖어 성장기를 보냈다. 해외 양부모들의 ‘기른 정’이야 어디 비길 데 없이 부족함이 없었지만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쉽게 지울 수는 없었다. 결국 장성해서 한국 땅을 다시 찾는 이들도 있었다.

40년 전 스위스의 한 가정에 입양된 김대원(44) 씨의 경우가 꼭 그렇다. 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뜬 뒤, 어머니는 집안 형편상 김 씨와 그의 형을 품에서 떠나보냈다. 독일어식 이름 ‘얀 벵거’로 새 인생을 살게 된 것이다.

스위스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면서 김 씨는 문득 내가 태어난 곳, 한국이란 나라에 본능적으로 이끌렸다. 양부모의 눈을 피해 12살부터는 집 주변의 한글 학교에 다니면서 우리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형편이 썩 좋지 않아 중학교 시절부터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양어머니를 돕느라 바빴고, 결국 대학 진학을 포기할 때에도 한국어 공부는 손에서 놓지 않았다.



군대도 다녀온 ‘스위스 시민’으로 자라났지만 취업을 준비할 땐 왠지 모르게 차별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김 씨는 “이력서만 봐선 좋게 얘기하던 사람들도 정작 면접에 가면 ‘다음 기회에 같이 일해보자’는 식이었다”며 “이력서에 사진을 안 붙이도록 하는 정책도 소용없다는 느낌이었다”고 그때를 떠올렸다. 고향땅으로 돌아가야겠다는 마음을 굳힌 때이기도 했다.

어렵사리 물류회사에 취업해 학비를 벌어가며 명문대를 졸업했지만, 90년 YWCA의 모국방문 연수 프로그램 참가를 계기로 한국과의 새로운 연이 시작됐다. 4년 뒤 두번째 방문 때엔 그렇게 그리워했던 생모와도 재회했다. 결국 2003년엔 편도 항공권을 끊어 입국해 정착하기에 이르렀다.

대한민국도 눈부시게 발전해 그를 다시 품을 준비가 돼 있었다. 하지만 국적을 되찾고자 하는 그에겐 또 하나의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복수국적’을 인정하지 않는 우리 국적법 탓에 입양된 나라의 국적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한국 국적을 회복할 수 없었던 것. 국적을 포기하는 게 마치 양부모와의 연을 아예 끊는 듯해 망설여졌다. 



하지만 올 1월 새로 시행된 개정 국적법은 국내에서 다른 나라 국적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는 것만으로 복수국적을 허용하기로 했다. 덕분에 김 씨도 흔쾌히 국적회복을 신청했다. 법무부는 19일 오전 김 씨처럼 해외입양인으로서 한국 국적을 회복한 13명에 대해 국적증서를 수여했다. 법 개정 이후 국적회복을 인정받은 입양인 첫 사례다.

국적증서를 받아든 김 씨는 “그렇게 그리워했었는데 다시 한국인이 됐다는 게 너무 기쁘다”며 “한국에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말했다.

<백웅기 기자 @jpack61>
kgungi@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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