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인경
나는 도시를 그린다. 나의 일상이 이루어지는 곳, 지금의 실존적 자리가 바로 도시이다. 결국 도시는 또 다른 ‘나 자신’인 것이다.나의 작업은 도시의 지속적인 변화와 시간의 흐름 그리고 그러한 공간 내부에서 공존하며 살아가고 있는 인간(나)에 대한 시선이다. 나와 도시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도시인의 기관은 도시의 장소와 접합되어 흐름과 소통을 경험한다.
도시에서의 삶은 자연 속에서 노닐었던 옛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인간형을 만들어냈다. 자본주의 구조 속에서 도시적 인간이 태어났다. 도시공간은 자연과는 또 다른 감수성, 시공간의 체험을 제공했다.
나는 먹으로 화면 위에 도시를 가설하고, 채색과 콜라주로 덧입혀 작업한다. 서로 다른 재료들이 혼재되어 구성되며 도시에서의 다양한 시간경험을 화면에 중첩시킨다. 마치 건축을 해나가듯 여러 시공간과 다양한 시점을 한 화면 안에 표현하는 것이다. 밤하늘의 별과 낮의 도시가, 회색의 건물과 녹색의 자연이 그렇게 서로 함께 있다.
작업에서 도시를 삶의 공간이자 작가 자신으로 인식하는 권인경의 작품 ‘순간의 지속’ |
나의 본 모습은 이런 도시 안에서 고스란히 표현되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 나는 내 자신의 모습을 인물 그 자체로 표현해 보고 싶었다. 시간이 덧입혀져 약간 바랜 듯한 누런 종이바탕이 나를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했다. 하얀 백지보다는 빛바래고 먼지가 묻은 듯한 것에서 느끼는 매력은 그것이 시간의 변화를 경험케 하기 때문이다. 흘러간 시간의 흔적들은 내 그림에서 대표되는 고서(古書)로 새겨졌다.
옛 선인들은 초상화를 제작함에 있어 터럭 하나를 놓치지 않았다. 눈을 통해 마음을 담고 수염 가닥으로 기상을 나타내며 전신(傳神)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그 안에서 한 인간의 삶과 태도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이다.
평소에 나는 감정변화가 얼굴에 다 드러난다. 그래서 때론 오해를 받곤 하는데 그림에선 일상의 진솔한 모습을 가는 먹선으로 간략하게, 어떤 부분에선 세세하게 표현해봤다.
작가 권인경의 ‘자화상’(2011년). 말간 얼굴의 작가는 모자를 살짝 덮어 쓴 모습으로 스스로를 표현했다. 세월의 더께가 입혀진 듯한 누런 종이에, 낡은 고서를 콜라주한 모자를 씌워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냈다. 젊은 작가이면서도 전통, 시간의 흐름 등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면모가 보인다. [사진=가나아트센터] |
나에게 모자는 또 다른 나의 표현이다. 때로는 치부를 감추어주고, 또 개성을 드러내주는 도구인 것이다. 웃으려다가 그 웃음이 무안한 듯 무표정으로 변해버린 평소의 모습으로 나의 시선은 화면 밖의 또 다른 나를 응시하고 있다. 작은 사각의 창속에서 나는 또 그렇게 찰나적으로 포착되고 빛바래져 간다.
오늘도 나는 도시 안에서 ‘도시’를 바라본다. 들여다본다. 단순한 관자(觀者)가 아닌 소요자(逍遙者)로서 도시 속에 녹아들어간다. 분리될 수 없는 도시와의 관계 속에서 나는 살고 있고 또 변화해갈 것이다.
[글·그림=권인경(화가)]
화가 권인경(33)은 홍익대학교 동양화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빛바란 고서(古書)를 콜라쥬하는 기법으로 도시를 표현하고 있는 작가는 2003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진경-그 새로운 제안’전에 참여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가나 장흥아틀리에 입주작가로 선발돼 장흥에서 작업 중인 작가는 서울 관훈동 갤러리이즈에서‘ 순간의 지속’(2009년)이란 타이틀로 개인전을 가진데 이어, 올 12월 다섯번째 개인전을 준비 중이다.
한 화면 안에 고서 콜라쥬와 먹선, 채색이 어우러지며 다양한 시점을 중첩시킨 권인경의 회화는 고정된 듯하지만 끊임없이 변화하고 움직이는 시간 속에 놓인 도시와, 그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현대인을 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