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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의 밑바닥까지 엿보고 싶다”...대중과 만난 ’엿보기’ 심리
말은 또다른 말을 만나 무성해진다. 보지 못한 그림은 상상 속에서 수많은 색을 입어 화려해진다. 듣지 못한 말들은 날카롭고 자극적인 단어들이 섞여 귓가에 속살거린다. 달콤한 황홀경이다. 우리 안의 숨은 욕망은 말을 만들어내고, 말을 부풀리며, 타자와의 관계에서 결단코 알 수 없는 내밀한 그림들을 꺼내보려 한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시작해 파괴적인 저속함으로 나아가는 ‘엿보기’의 일종이며 그것의 지속이다.

사람들은 ‘타인의 삶’을 엿보기를 갈망한다. 그것은 신비주의로 무장한 스타들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것부터 옆자리 낯선 이의 사소한 취향에 관한 것에 이르기까지 그 폭도 넓다. 결코 저물지 않을 권력에게선 한순간 무너져내리는 나약함을 엿보길 원하고, 늘 짓밟히기만 하는 밑바닥 인생에게선 뾰족한 한 방이 보여지길 희구한다. ‘엿보기’에 대한 것은 ’선악의 경계’도 ’정도의 질량’도 모호하다.

때문에 엿보기에 대한 욕구는 ‘욕망’에 가깝다. 그것이 어느 선을 지키고 있느냐에 따라 욕망의 수위가 조절된다. 이것은 개인이 빚어낼 경우 지극히 주관적 환상에 기인한 것이 되고, 여럿의 개인들이 탐하는 것일 때엔 놀랍도록 왜곡된 환상으로 확장될 수 있다.

엿보기에 대한 욕구가 대중문화와 만나자 수많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미국, 영국을 위시해 시작된 이들 프로그램은 뒤늦게 대한민국 본토에도 상륙해 유명 연예인들의 사생활을 엿볼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양산됐다. 공중파는 말할 것도 없으며 케이블 채널들은 앞다퉈 이들의 일상을 노출시키고, 화려할 것 같지만 또한 비루하기 그지없는 스타들의 이야기를 전해왔다. 갑남을녀는 이제서야 느꼈다. 이들도 우리도 똑같은 사람이었다고. 거기에서 안도하고 만족감을 느꼈다.

이 같은 엿보기에 대한 욕망이 구체적으로 펼쳐진 것은 한 편의 영화였다.

짐 캐리가 녹색 가면(’마스크’)을 벗어던지자 그는 평범한 샐러리맨이 됐다. 영화 ‘트루먼쇼(1998, 감독 피터 워어)’에서였다. 짐 캐리의 트루먼은 평범하고 소박한 일상을 살아가는 남자였다. 그의 곁에는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아내가 있었다. 직업은 보험회사 외판원, 특이사항은 ‘물 공포증’. 잘 웃고 작은 일에 감사할 줄 아는 그는 지극히 평범한 남자다. 

트루먼은 아무리 봐도 우리 옆자리의 누군가와 다르지 않다. 만일 트루먼의 삶을 누구도 엿보지 않았다면 더없이 그렇다. 그러나 트루먼은 본인만 모르는 슈퍼스타였다. 이 땅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모든 이들에게 자신의 일상이 낱낱이 까발려진 자, 그는 철저한 외톨이였으나 모두의 사랑을 받았다. 그를 엿보는 자들은 ‘나는 너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은밀한 충만감을 느끼며 그의 것과 나의 것이 그리 다를 바 없는 삶임을 깨닫는 순간 현실에 안도하게 된다.

판타지를 입고 등장해 수천개의 시선이 보내는 광기어린 회심의 미소를 담은 이 영화는 ‘엿보기’에 대한 욕구가 집단적으로 실현된 결과물이었다. 

문학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최근 서점가에 ‘광풍’을 몰고 온 신정아씨의 자서전 ‘4001’에 대한 독자들의 시선은 일종의 관음증이다. 하루 만에 판매부수 2만부를 돌파하며 출간 사흘 만에 단숨에 판매부수 3위로 뛰어올랐다. 이 광적인 인기에 반영된 것은 대중들의 관음증적 성향이었다.

‘신정아 게이트’라는 단어로 설명될 만큼의 신씨의 2008년도 학력위조 사건에는 정재계, 언론계의 수많은 인물들이 거론됐다. 이 유명인사들의 실명이 활자로 남겨졌다. 책 한 장 한 장에는 그들의 치부가 낱낱이 드러났다. 깊은 곳에 숨겨놓아도 모자랄 이들의 불륜 스캔들이 만천하에 공개됐다. 소위 ‘막장’으로 분류되는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스토리가 빼곡히 채워졌다.

대중들은 이 조악한 스토리가 전하는 세계에 기꺼이 동참했다. 무의식적으로 이끌렸고, 열광하기에 따라갔다. 흥미를 자극할 이야깃거리임은 분명했다. 세간의 화제를 모은 사건과 누구나 다 아는 인물들이 얽힌 이들의 이야기에 사회 속의 내가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집단관음증은 꽁꽁 숨겨둔 저속한 사회 분위기가 고개를 내밀자 마침내 드러나기 시작했다.

저열하진 않지만 잔인했던 엿보기도 있었다. 지난 27일 오후 시청자와 누리꾼이 집중했던 것은 ‘우리들의 일밤-서바이얼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이었다. 프로그램에 대한 논란은 방송 이전부터 컸다. 기획 의도에서 시작해 탈락자 조작설로, 재도전으로, 패러디와 스포일러로, PD교체와 재도전에 응했던 김건모의 자진 사퇴로 논란은 확산됐다. 

순식간에 불어닥친 일들에 시청자와 누리꾼들의 손은 분주해졌다. 후반의 재도전 논란이 일자 누리꾼들은 “시청자를 우롱했다”며 제작진의 사과와 사퇴를 요구했다. 이내 김영희PD의 교체가 결정되자 온라인에서는 다시 김영희PD의 복귀를 청원하기 시작했다. 손바닥 뒤짚듯이 무성한 말들이 쏟아진 일주일간의 이야기였다. 막상 ‘나는 가수다’가 전파를 타자 분위기는 또 한 번 반전됐다. 가수들의 진심 어린 노래에 모두가 감동한 모양이었다. 논란을 잠재운 것은 결국 ’음악’이었다는 반응이 이어졌다.

방송에서는 재도전에 응한 가수 김건모가 손을 바르르 떨면서 정엽의 ’유어 마이 레이디(You’re my lady)’를 불렀다. 본 경연도 아닌 리허설에서 노래를 부르지 못하겠다며 백지영은 눈물을 흘렸다. 시청자들의 마음이 시린 비난에서 진한 감동으로 돌아선 순간에 이 장면들의 기여도는 꽤 컸다.

데뷔 20년차 국민가수는 7위의 충격에 혼란 속에 머물다 고심을 거듭해 재도전을 결정했다. 무대에 오르기까지, 무대에 올라 노래를 무사히 마치기까지 그럼에도 쉽지 않은 길이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국민가수의 떨림은 ’진심’이라는 단어로 되돌아왔다. 데뷔 14년차 스토리는 풍부하지만 무대 위에서만큼은 누구보다 당당했던 백지영의 눈물에선 이 무대의 긴장감과 중압감을 온전히 느끼게 했다. 화려한 별들의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통해 전해지자 대중들의 시선에는 ’아, 저들도’라는 탄식이 배어나기 시작했다. 이들의 고통이 온전히 고통으로만 받아들여졌다면 그것은 ’위선’이었다. 마침내 나약하게 주저앉는 스타들의 모습을 엿보고 싶었던 심리, 그런 그들이 그럼에도 다시 날개를 펴주길 바라는 대체 욕망이 뒤섞인 감정이었다.

누군가의 밑바닥 삶까지 엿보고 싶어하는 대중들의 욕구가 내밀하게 드러나 무한히 확장되는 곳은 역시 대중문화였다. 그것은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구체화되고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통해 발전을 거듭했다. 발전에 뒤따르는 것은 이 사회가 보여주는 현재의 모습이었다. 은밀한 사생활에서 희노애락의 사사로운 감정들마저 알아채고 싶어했던 욕구들이 여러 스토리들과 섞여 짐짓 파괴적으로 그 모습을 꺼내가고 있는 요즘이었다.

<고승희 기자 @seungheez>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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