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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싸인-장자연, `살아있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으려면
여기에는 두 부류의 ‘산 사람’이 있었다. 죽은 자를 통해 진실을 말하려는 사람들과 죽은 자를 통해 권력을 얻고자 하는 혹은 유지하려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온 몸으로 진실을 묻은 채 죽어간 사람들이 있었다. ‘죽은 자’가 수단이 될 수 있던 것은 드라마가 정조준한 이 사회에는 계급과 신분, 힘의 불균형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싸인(SBS)’은 죽은 자의 몸을 통해 그것을 말했다. 진실과 진실의 은폐, 권력과 권력에 기생하는 자, 권력에 맞서 진실을 밝혀내려는 자들의 이야기였다.

우리는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믿었다. 게다가 억울한 죽음을 당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내던진 이들에겐 의혹만 눈덩이처럼 커져갈 따름이었다.

연예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간 수많은 연예인을 보자. 지난 2008년 고(故) 안재환을 시작으로 최진실로 이어지는 일련의 자살 사건에는 ‘의혹’은 커져 산 사람들에겐 ‘모호한 진실’만을 남겼다. 죽은 자는 아무런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다빈의 갑작스러운 자살, 가수 유니나 배우 이은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떠난 이들의 자리에는 소문이 무성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저 말없이 떠났다.

드라마는 ‘죽은 자’가 말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이것은 지난 2009년 ‘장자연 리스트’라는 무성한 소문만 남긴 채 떠났던 고 장자연이 2년이 지난 현재 ‘자필 편지’로 부활한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죽은 자도 말을 하고 있었다.

’싸인’은 죽은 자가 온몸으로 기억하고 있는 ‘진실’을 ‘부검’이라는 과정을 거쳐 밝혀내려했다. ‘진실’ 그것이 그 자체로 ‘싸인(sign:흔적)’이었다. 과정은 쉽지 않았다. 진실은 시시각각 충돌했다. ‘진실’이 모든 증거를 갖춰 밝혀지면 드라마는 20부까지 거슬러 갈 수 없었으며 그 시간동안 37명의 사망자를 쌓아둘 이유도 없었다. 이 숫자는 진실을 밝혀내기 위한 대가였다.

■ 아이돌 스타의 죽음...‘김성재’로 시작해 ‘장자연’으로 맺는 드라마

‘반전에 반전’이라는 것은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다. 마지막 타깃은 박신양(윤지훈)이었다. 우울증과 피해망상이라는 거짓된 진실로 이 남자에게는 ‘자살’이라는 멍에가 씌워질 수도 있었으나 그것은 마지막 진실을 밝히기 위한 스스로의 선택이었음이 이내 드러났다.

드라마 ‘싸인’이 만들어낸 37인의 사망자에 마침내 발로 뛰던 부검의 윤지훈의 이름이 올랐을 때 ‘정의’는 그제서야 실현되는 것처럼 보였다. 모든 ‘키’를 지고 있는 시신이었으며, 단 하나의 끝을 통해 모든 ‘진실’을 말하고 있는 ‘죽은 자’였다. 그의 싸인을 권력의 곁에서 기생하는 자들은 ‘죽음’이 도래해서야 알아차렸다.

드라마는 첫 방송에서 아이돌 가수 서윤형의 죽음으로 시작해 다시 서윤형의 죽음을 둘러싼 사건으로 되돌아왔다. 우리는 여기서 95년 가요계를 충격에 빠뜨렸던 고 김성재 사건을 떠올렸다. 인기 정상의 가수를 둘러싼 의문의 죽음이었다는 점에서 그랬다.

드라마가 회차를 거듭해 나갈수록 보여주는 것은 개인의 죽음에 덕지덕지 묻어난 음습한 권력의 크기였다. 이제 은폐는 권력으로부터 시작됐다. 의문의 연쇄살인을 덮는 데에는 국과수에 지원을 약속한 200억이라면 충분했다. 국과수는 ‘권력’을 가지기 위해 ‘권력의 시녀’가 돼야 했다. 이로써 죽은 자의 진실을 은폐하고, 결과를 조작하는 일이 높은 담처럼 쌓여갔다.

시작과 끝은 맞닿았다. 죽음의 실체는 달랐지만 드라마가 말문을 열었던 죽음이 드라마의 끝에서 다시 돌아올 때 그것은 2년 만에 살아난 장자연의 죽음과 닮아있었다. ‘31명에게 100번의 성상납을 했다’는 묵은 편지가 공개되자 ‘망각된’ 기억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이면에 숨은 것은 뻔히 예상했던 추잡한 진실이었으며 막강한 권력을 가진 어둠의 실체들이었다. 그것은 차기 대선의 잠룡으로 떠오른 후보의 딸이 가진 권력의 크기, 어긋난 특권의식과도 맥을 같이 했다.

■ 故 장자연 문건 필적 감정...‘키(key)’는 ‘국과수’

드라마도 현실도 모든 키는 국과수가 쥐고 있었다. 주검이 되어 국과수로 돌아온 윤지훈은 “우리가 해야할 일은 단순히 사인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남긴 마지막 이야기를 듣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제 죽음으로 진실을 말하고 그것을 통해 권력에 기생하지 않는 정의를 이야기하려 하고 있다.

산 자들은 죽은 자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윤지훈을 대신해 뛰기 시작했다. 다경(김아중)은 지훈이 아이돌스타 서윤형의 죽음을 파헤치기 위해 시신을 빼돌리던 날처럼 지훈의 시신을 빼돌려 직접 메스를 들이밀었다. 무엇을 해도 ‘국과수를 위한 일’이라며 권력의 곁에서 조작과 은폐를 일삼았던 이명한(전광렬)도 이번만큼은 진실의 옆으로 다가왔다.

현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진실도 국과수의 손에 맡겨졌다. 또 다시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 장자연 사건에서는 ‘자필편지’로 추정되는 문건이 모두 23장이 확보됐다. 벌써부터 조작설이 고개를 내밀지만 이 문건에 대한 친필 감정은 국과수에 맡겨졌다.

드라마는 윤지훈의 죽음에서 서윤형의 것을 발견한다. 독이 든 커피를 마셨던 윤지훈에게 내려진 사인은 ‘비구폐쇄성질식사’, 이는 명백한 타살이라는 증거, 살인의 주체는 대통령 후보자의 딸 강서연이었다.

이제 현실에서 장자연의 문건이 친필로 밝혀질 경우 사건의 시발점은 다시 뒤집어지게 된다. 조현오 경찰청장은 이와 관련 10일 “발견된 편지가 진본이라면 국민적 의혹이 제기되는 모든 부분을 전면 재수사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지난 2009년 수사가 부실했다는 지적에는 “당시 20여명에 대해 성역 없는 수사를 했고 유력 언론사 관계자 등 논란이 됐던 사람들에 대해 혐의 없음을 확인했다”며 “이번에 편지를 공개한 전모(32.왕첸첸)씨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어서 신뢰할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권력의 힘은 마지막까지도 존재했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강서연은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의 손에 수갑이 채워지면서도 강서연은 “어차피 나는 무죄로 풀려날 것”이라며 일개 ‘검찰 따위’는 무참히 비웃어버렸다. 권력들 사이에조차 불균형은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장자연 사건이 2년 만에 다시 고개를 내민 지금, 지난 1991년 명지대생 강경대 씨가 시위 도중 ‘백골단’으로 불리던 경찰체포조에 의해 쇠파이프로 맞아 사망한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이 시작을 계기로 전민련으로 활동하던 김기설 씨가 ‘노태우 정권 타도’를 외치며 자결, 당시 정권은 최대 위기를 맞았다. 이 때 기획된 것이 ‘유서대필조작사건’이었다. 검찰은 각본을 짜고 국과수는 분석 결과를 조작했다. 김씨의 죽음과 관련 전민련의 총무부장인 강기훈을 유서를 대신 써주었다며 자살방조 혐의로 기소한 것이다.

필적변화를 악용해 진실을 은폐했던 이 사건은 이후 돌고 돌아 세상에 드러났으나 이는 결국 이 땅에서 진실을 밝히는 것이 얼마나 긴 시간을 필요로 한 것인지 보여줬다. 무려 18년만에 밝혀진 진실이니 말이다.

이제 장자연의 사건은 국과수를 통해 필적감정을 받고, 경찰은 문건에 대한 분석 작업을 시작한다. 당사자가 아니면 모르는 내용이 있는지, 또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알 수 있는 내용인지, 당사자라면 쓰지 않았을 내용 등 모순되는 부분들이 있는지와 관련한 세 부분에서 분석을 진행할 계획이다.

진실이 무엇인지, 진실은 밝혀질지 궁금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싸인’에서 국과수 원장 이명한은 “국과수가 권력을 가지기를 원한 것이지 권력의 시녀가 되기를 바란 것은 아니다”라면서 “국과수는 어떤 기관보다 독립과 자치가 필요한 기관이다. 어떤 권력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지켜달라”고 새로운 권력 앞에 당부한다.

모두가 은폐된 진실을 밝히기 위한 산 자의 뒤늦은 회개였으며, 죽은 자를 위한 산 자의 도리였다.

<고승희 기자 @seungheez>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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